오피니언 사설

안보위기 아랑곳없이 또 폭력국회라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8면

2001년 9·11 테러 9일 후 부시 미국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회의장에 섰다. 국민의 대표 앞에서 대국민 연설을 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최후통첩을 전달하면서 “국제테러 조직의 전멸이 이번 전쟁의 목표”라고 선언했다. 연설 35분 동안 모두 서른 번의 박수가 터졌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통령과 국민이 만나는 첫 번째 장소는 국회의사당이다. 적에게 단호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소로도 의사당이 제격이다. 의사당은 국가가 공동체의 결의(決意)를 과시하는 대표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9·11 때 미 의사당(the Capitol Hill)은 그 역사적인 역할을 멋지게 해냈다.

  지금 대한민국은 6·25전쟁 이래 최대의 안보위기를 맞고 있다. 북한은 제3, 제4의 도발을 공언한다. 위험은 9·11보다 큰데 한국의 의사당은 단합은커녕 ‘분열의 전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김정일을 향해 고함을 치고 돌을 던져야 할 의원들이 서로를 향해 소리치고 멱살을 잡았다. 국민은 올해만큼은 이런 장면들을 보지 않기를 바랐다. 안보 비상시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벌어지고 말았다. 고함과 점거, 충돌과 파괴 속에서 새해 예산안이 통과됐다.

  이번 사태에 대해 야당 측에 먼저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야당은 관습적인 폭력 투쟁을 벌여왔다. 미디어법이나 예산안 파동 때 폭력은 반복됐다. 여야 협의가 결렬되면 야당은 우선 상임위를 물리적으로 점거한다. 의장이 직권 상정을 하려 하면 본회의장을 점거한다. 여당이 표결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폭력과 충돌이 발생한다. 이번에도 야당은 국토해양위를 점거했다. 4대 강 사업 관련 ‘친수구역 활용 특별법’을 막기 위한 것이다. 4대 강 사업 관련 상위에서는 예산안 심사를, 예결위에서는 예산안 합의를 거부했다. 이미 절반 넘게 진행된 4대 강 사업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유례 없는 안보위기 상황에서 국민은 국회가 이번만큼은 예산안 통과 법정시한(12월 2일)을 지키기를 바랐다. 시한이 넘자 한나라당은 정기국회 폐회(12월 9일) 이전에 예산안을 통과시키겠다고 했다. 물론 안보위기라 해서 야당이 법안·예산안 심사를 대충 넘기라는 게 아니다. 임무는 충실하게 하되 방법은 합법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야당은 예년보다 더 격렬한 폭력으로 맞섰다. 국회 본회의장 유리창을 깨고 난입했다. 이후의 결과는 국민이 지켜본 것과 같다. 거기엔 다수결도, ‘연평도’도 없었다.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국회의 안보위기 분위기를 더 활성화하기 위해 현명한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대통령은 소통이 많이 부족하다. 담화만 발표했을 뿐 기자회견도, 여야 영수회담도 하지 않았다. 국회에서 대국민 연설을 하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과 여당이 그런 노력을 보였으면 야당은 ‘자제(自制)의 책임의식’을 더 느꼈을 것이다. 여권은 아마도 “안보 상황이 발생했으니 국민이 우리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능한 여권, 무도(無道)한 야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