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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책갈피마다 살아나는 백제의 숨결, 부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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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윤재환씨가 ‘신부여팔경’의 하나로 꼽은 주암리 은행나무 그림들. 임옥상 ‘천오백년의 바람’. [스펙트럼북스 제공]


그 나무 참 장하게 생겼다.

 화가 임옥상씨가 그린 ‘천오백년의 바람’은 천둥번개 치듯 가지가 쭈뼛쭈뼛 뻗어나간 모습이 신묘하다. 이종구씨의 ‘잠자는 부처’는 뿌리가 부처님인 듯 표현돼 장엄하면서 영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에 비하면 만화가 박재동씨의 스케치는 곰살궂다.

이종구 ‘잠자는 부처’. [스펙트럼북스 제공]

 3인3색 그림의 주인공은 충남 내산면 주암리 녹간마을 뒤편에 서있는 은행나무다. 백제 제26대 성왕 16년(538)에 사비(부여)로 천도할 당시 심었다니 나이가 1500살 가까운 노거수(老巨樹)인데도 정정하기가 젊은 나무 못지않다. 난리나 전염병을 모면하게 해준 전설 같은 사연이 전해져왔다. ‘지혜의 나무’ 대접을 받으며 제삿밥도 얻어먹는다.

 이 신목(神木)을 화가들에게 안내한 이는 윤재환(48·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사무국장)씨다. 백제초등학교 시절 백제탑이 놀이터였고, 부여중학교를 다닐 때는 궁남지 마름을 건져 군것질거리 삼았던 소년이다. 그는 20여 년 전부터 부여 알림꾼을 자임하며 수백 명 문화인들을 조용히 부여 곳곳으로 안내해왔다. 538년부터 660년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왕도였던 부여를 그는 백제미의 고갱이가 담겨 있는 숨은 보석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부여를 제대로 보는 안목을 키우지 못해 침묵하고 있을 뿐이라는 믿음으로 부여문화의 부활을 위해 애써왔다.

 그가 펴낸 『윤재환의 신부여팔경(新扶餘八景)』(스펙트럼북스)은 수십 년 그가 몸과 마음으로 받들어온 부여에서 새롭게 발견한 여덟 군데 빼어난 경치를 더듬고 있다. 금성산 조망, 부소산 산책, 백제탑 석조, 궁남지 연꽃, 무량사 매월당, 장하리 삼층석탑, 대조사 미륵보살, 주암리 은행나무가 신부여팔경이다.

박재동 ‘주암리 파를 심는 부부’. [스펙트럼북스 제공]

 무엇보다 함께 답사 길에 나섰던 화가와 만화가들이 흥이 나서 그린 작품들이 먼저 손짓하기에 눈을 즐겁게 한다. 볼 것이 없다는 부여를 입체감 있게 표현한 그들 마음이 독자에게 훈훈하게 전해진다. 지은이가 찾아낸 지도와 사진 등 부여 관련 자료들도 낯선 땅으로 들어서는 여행객을 이끌 만큼 알차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이런 윤씨의 노력을 ‘부여 백제의 부활을 꿈꾸는 여행’이라며 “부여를 찾는 사람들이 늘 허전해 하는 일면을 이 스토리텔링으로 엮어진 책이 크게 채워 줄 것”이라고 격려했다. 하마다 요(濱田陽) 테이쿄대학 교수는 “페이지를 넘기며 처음 대하는 사진이나 그림에 마음을 빼앗겨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있는 백제와 리듬을 맞추며 심호흡하게 된다”고 즐거워했다. 백제 부활의 사명을 띠고 태어난 백제 소년의 어린 시절 꿈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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