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있는 그림 /내 마음의 개여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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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시골 편안하면서도 목가적 정취가 묻어나는 정경. 우리나라의 시골 어디서든지 누구나가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흔한 시골 풍경 속에서 작가는 삶의 철학과 뜨거운 감동의 정서를 그림으로 표출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향수를 맡고파 조심스럽게 자연으로 몰입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 「내 마음의 개여울」, 「보라빛 향연」, 「가을의 속삭임」 등의 작품이라면, 「개나리의 작품」, 「낙엽진 계곡」, 「노란꽃과 대화하며」작품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풍경으로 녹색과 노란색의 톤이 주조를 이루면서 생동감 넘치게 그린 것이다. 사계절 중에서 작가는 봄과 여름을 많이 그리고 있다. 봄 ·여름 계절이 주로 나타난다는 것은 생명감의 충일을 만끽하려는 작가 심연의 본질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의 개여울」, 「폭포수처럼 맑아지고파」, 「파도는 내 마음처럼」은 물을 통해서 실험적으로 맑아지고픈 마음을 그림 것이다.

작가는 물에서 주제를 찾았다. 맑디맑은 물에서 가슴 뭉클한 남모르는 감동을 받은 것이다. 「내 마음의 개여울」, 「폭포수처럼 맑아지고파」, 「파도는 내 마음처럼」등등의 작품들을 보면 시선이 자연스럽게 물에 고정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선이 물에 고정되게끔 한 이는 바로 작가 자신이다. 감상하는 사람들은 물을 바라보며 작품에서 말하고자하는 주제가 무엇이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작가의 의도에 따라 숨어있는 이중적 장치 때문에 작품을 어렵지 않게 감상을 할 수 있다.

작가는 물을 통해서 물처럼 맑아지고픈 작은 소망을 담고 있다. 물처럼 깨끗하면서도 막힘없이 살고 싶고 어떤 형태의 그릇이든지 즉 삼각형이면 삼각형, 사각형이면 사각형, 원형이면 원형 등 모든 그릇에 다 담길 수 있는 그런 작가의 의미있는 삶의 철학이 화폭에 녹아 있는 것이다. 화폭을 통해서 작가는 보는 이에게 자신의 영혼, 인간의 근원적인 실존에 대한 삶의 모습을 속삭이고 있다. 사물의외적 현상에서 자연의 본질을 찾아내기보다는 자연 속에 담겨있는 삶의 본질을 찾아내려고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그 속에서 자기의 언어를 화폭에 인간적 향내가 나는 모습으로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내 마음의 개여울」도 역시 물이 주제이다. 개여울을 주제로 앞에 펼쳐진 두 갈래의 길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전개부분이다. 인생길의 갈래가 수없이 많지만 길을 선택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디로 가야할 지 어느 길을 선택해야 옳은지 항상 자문자답을 하게 한다. 선택한 길이 최선을 다 한 길인지 아닌지…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정답을 요구할 수는 없다. 물음은 물음 그 자체로 족하기 때문이다. 길 앞의 구덩이와 그림자는 그림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여백의 공간이다. 이 여백으로 우리는 넉넉한 작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진흙탕 길을 걷고 싶어」는 작가의 유우머와 익살스러움이 있고, 애브노멀한 파격의 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맑은 물을 이상으로 삼아 그림을 그리지만 또 다른 저편 세계도 그려보고픈 욕망이 있는 것이다. 걸어보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이랄까! 작가의 단편적인 성격이나마 엿볼 수 있다.

이번 작품전의 화풍은 부드러우나 대담하며 디테일하기보다는 거칠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터치의 필법으로 작가의 개성이 화폭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강렬한 색감의 조화와 거친 듯한 촉감의 화필, 꺼릴 것 없는 대담한 화폭 구성 등에서 작품전이 거듭될 때마다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구축하는 한편 확대 발전시켜 나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작가가 상념의 세계로 빠져드는 시간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벅찬 자연의 감동을 말하는 중얼거림은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소리인 것이다. 나를 감추고자하나 나의 속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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