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의 블레어'로 키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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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영국 정치판에 '보수당판 토니 블레어'가 탄생했다. 보수당이 총선 3연패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10일 단행한 인사에서 발탁된 조지 오스본(33.사진) 의원이 주인공이다. 최연소급 재선 의원인 오스본은 당내 2인자 자리인 예비내각(Shadow Cabinet) 재무장관에 임명됐다.

지난 5일 실시됐던 총선의 패장 마이클 하워드 당수가 자진사퇴 의사를 밝힌 상황에서 허심탄회하게 내놓은 개혁인사다. 보수당 지도부가 노동당 정권을 꺾기 위해선 1997년 총선 당시 노동당이 채택했던 '젊은 후보 블레어' 전략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스본은 10월 예정된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할 다크호스로 주목받고 있다.

◆ 블레어와 오스본=오스본 의원은 여러모로 블레어를 닮았다. 첫째, 그는 블레어와 같은 30세에 원내 진출한 신예다. 둘째, 블레어와 옥스퍼드 동문인 엘리트다. 블레어는 법학을, 오스본은 역사를 전공했다. 셋째, 둘 다 말을 잘하고 미디어와 친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공통점은 개혁파 소장그룹의 핵심 멤버라는 점이다.

블레어는 소장 의원 시절부터 노동당 좌파 노선의 우경화를 주장했다. 과거와 같은 사회주의적 발상으로는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94년 당권을 잡자마자 노동당 규정의 핵심 조항인 '생산 수단의 공공 소유'를 삭제했다.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냐"는 비판에 블레어는 "과거 식의 사회주의라면 버린다"고 대답했다. 덕분에 블레어는 97년 총선에서 중도파의 표를 휩쓸었다. 18년 장기집권한 보수당의 참패였다.

현재 보수당의 정치적 위상은 블레어가 등장하던 시점의 노동당과 매우 비슷하게 절망적이다. 그만큼 획기적인 대안이 필요했다. 오스본은 블레어와 같은 방식의 개혁을 외쳐 왔다. 기본적인 득표 전략이 같다. 중도파를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천 방안도 같다. '보수당의 전통 철학을 벗어냐야 한다'는 당 개혁이다. 그는 번영의 뒤안길에 처진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 주장은 좌파 논리다. 블레어가 좌파 노동당을 우경화했다면 오스본은 우파 보수당을 좌경화하려는 셈이다. 방향은 반대지만 접근방식은 똑같다. 오스본은 또 구정치의 유물인 네거티브 전략을 거부한다. 그는 "80년대식 정쟁은 끝난 지 오래다. 정치도 상품이다. 유권자는 곧 소비자다. 상대방을 비난하기보다 우리 스스로 좋은 상품을 내놓아야 이긴다"고 말했다. 마이클 하워드 당수는 지난 5일 총선에서 '블레어는 거짓말쟁이'라는 네거티브 전략에 매달렸었다. 당수의 선거전략을 정면 비판한 셈이다.

◆ 오스본은 누구=신예지만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스본 앤드 리틀'이라는 제지업체 소유자인 귀족집안의 아들로 보수당 성골이다. 옥스퍼드 재학 시절 보수당 대의원으로 전당대회에 참석해 정치꿈을 키웠다. 마거릿 대처의 후임 존 메이저 총리의 정치담당 비서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97년 총선 패배 직후 윌리엄 헤이그 당수 시절엔 정치보좌관으로 일했다. 당시 헤이그 당수와 의회에서 연설 대결을 벌이는 블레어 총리를 보면서 정치적 테크닉을 많이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블레어와 같은) 떠오르는 별"이라는 칭찬에 대해 "그런 칭찬은 저승사자의 키스"라며 경계했다.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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