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다리 깁스하고 골프장 나타난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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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호 14면

어떤 남자가 라운드 도중 전화를 받았다. 놀란 표정을 지은 그는 홀 아웃을 하자마자 황급히 앞 팀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정제원의 골프 비타민 <137>

“마누라가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다는데 패스 좀 시켜 주실래요. 저희 팀이 먼저 치고 나갈게요.”

시중에 떠도는 골프 유머다. 골프가 그만큼 재미있다는 뜻도 되겠지만 이 유머 속엔 골프 약속을 함부로 어기지 말라는 의미도 함축돼 있다. 그래서 주말 골퍼들 사이엔 ‘부모상이 아니고서는 골프 약속을 펑크 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한 술 더 떠서 ‘본인 사망이 아니고서는 골프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말도 나온다.

내게 골프 약속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이는 한 기업인이다. 6~7년 전쯤의 일이다. 날씨가 화창하던 주말 오후, 나는 선배 일행과 라운드에 나섰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중견기업의 부사장 K와 인사를 나누게 됐다. 악수를 마치고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는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K부사장의 오른쪽 다리에는 깁스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깁스를 하시고 어떻게 골프를 치시려고요.”

“아, 뭐 괜찮습니다. 오늘은 다리가 불편하니 양해해 주신다면 티샷은 생략하고 어프로치와 퍼팅만 하도록 하지요.”

초로의 신사는 그날 드라이버를 잡지 못했다. 우리 일행은 그가 신입사원들과 씨름을 하다 다리 인대가 끊어져 깁스를 하고 나왔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다리 인대가 끊어졌는데 어떻게 골프를 할 생각을 하셨어요.”
“허허, 이거 참 부끄럽습니다. 신입사원들과 씨름을 하는 건 우리 회사 전통인데 과욕을 부렸다가 그만 인대가 끊어지고 말았네요. 그래서 이렇게 깁스를 하고 나왔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골프를 즐기세요.”

나는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초로의 신사는 일행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홀마다 세컨드샷 지점에 공을 드롭한 뒤 거기서부터 플레이를 하는 거였다. 내가 드라이브샷한 공이 떨어진 바로 옆에서 그는 어프로치를 했다.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서도 그는 공을 잘도 붙였다. 그러고는 ‘줄 파’ 행진을 했다.

게다가 파3홀에선 아이언으로 조심스럽게 티샷을 했다. 변함없이 그의 다리엔 깁스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도 그는 가볍게 온 그린에 성공한 뒤 버디까지 잡아냈다. 성한 몸으로도 온 그린조차 못하는 내 실력이 부끄러웠다.

그날 우리 일행은 라운드를 마친 뒤 저녁식사까지 하고 기분 좋게 헤어졌다. 식사 도중 그는 골프 약속에 대한 그의 철학을 밝혔다.

“사소한 이유로 약속을 어긴다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믿고 비즈니스를 하겠습니까. 골프 약속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대가 끊어졌다고 해서 약속을 취소하는 것은 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오히려 일행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골프 약속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 이후 나는 한번 골프 약속을 했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런데 K부사장이 누구냐고? 지금은 부회장이 되셨다고 들었다. 그는 현대하이스코 김원갑 부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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