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가을과 잘 어울리는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64) 선생을 떠올린다. 평온하면서도 우수 어린 표정, 늘 겸허한 태도와 말수가 적은 묵직함에 긴 바바리까지 차려입고 나서면 그는 영락없는 파리의 가을 남자다.
[PORTRAIT ESSAY ]이은주의 사진으로 만난 인연
13년 전 한창 음악가 사진을 촬영하던 시기에 처음 그를 만났다. 그의 피아노 선율에 담긴 인간미와 철학적 깊이에 감동한 나는 연주회마다 카메라를 메고 그림자처럼 그를 쫓아다녔다. 고개를 피아노 쪽으로 묻은 채 피아노에 열중하는 그의 모습에선 피아노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운명의 힘이 느껴졌다.
리허설 때 무대 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을 때는 행여 셔터 소리가 연주가를 방해할까 봐 가슴을 졸이곤 했다. “혹 제 셔터 소리가 방해되면 찍지 않을게요”라고 했더니 그의 답이 뜻밖이었다. “걱정 마세요. 저에게는 피아노 소리만 들립니다.”
그랬다. 그에게는 모든 세상의 소리를 물리치는 피아노 소리만이 함께했다. ‘건반 위의 구도자’와 함께하는 나의 카메라 순례는 그래서 늘 편안하고 행복했다.
이은주씨는 1981년 제3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국내외에서 개인전을 20여 회 했다. 저서로 사진집 『108 문화예술인』 『이은주가 만난 부부 이야기』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