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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의 경계 자유롭게 설정하는 정당이 성공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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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호 19면

장하준 교수는 한국 자본주의 성공 사례를 그의 베스트셀러 저작에 자주 인용함으로써 ‘한국 모델’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 [사진작가 송인호]

우리나라가 국력에 비해 취약한 부분은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공공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공공지식인은 저술과 신문 기고로 여론의 형성과 향방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장하준 교수가 최근 『(자본주의에 대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를 출간해 세계적인 공공지식인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그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8>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공공지식인의 펜에는 그가 속한 나라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 장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도 박태준 철강 신화를 비롯해 한국 사례를 인용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한 세대에 달성한 한국의 발전 모델에 대한 세계인의 궁금증을 장 교수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들이 어느 정도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영문판과 도서출판 부키에서 나온 국문판(김희정·안세민 옮김).

장하준 교수의 전공분야는 ‘개발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of development)’이다. 그는 케임브리지대에서 로버트 로손 교수에게 지도 받았다. 로손 교수는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절충안인 산업 정책 이론을 구체화한 석학이다. 국제정치경제학자인 수전 스트레인지(1923~98) 교수는 로손 교수를 일컬어 “비즈니스 스쿨에서 읽히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평한 바 있다. (스트레인지는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만든 학자로 유명하다. 카지노 자본주의는 투기자본이 세계경제를 교란하는 것을 도박판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장 교수는 국가·시장·제도 이론, 세계화, 무역·산업 정책, 동아시아 경제 등의 영역에서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는 ‘세계의 주도적 비정통주의(hetrodox·unorthodox) 경제학자’ ‘자본주의에 대한 최고의 비평가’ 중 한 사람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의 저서는 중국어·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 등 15개 언어로 번역됐다. 장 교수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유엔연합개발계획(UNDP), 국제노동기구(ILO) 등 유엔 기구,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유럽투자은행 등 국제기구뿐만 아니라 캐나다·일본·남아공·영국·베네수엘라 정부의 컨설턴트로 활약했다. 그는 특히 에콰도르 대통령 라파엘 코레아의 경제 정책에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장하준 교수는 김대중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장재식 전 민주당 의원의 장남이다. 그는 초등하교 4학년 때 한 시간에 250페이지를 독파할 수 있는 독해력을 갖추었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영어 원서로 11독하고 번역판으로 12독을 했다. 그는 박사 학위도 받기 전인 1990년, 27세 나이에 한국인 최초의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돼 화제가 됐다.

장 교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주류 경제학의 통설을 파괴하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 통설의 파괴가 필요한 이유는 주류 경제학이 경제성장 둔화, 불평등 심화, 고용 불안정성 증가, 금융위기 빈발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괴 수단은 역사에서 발견되는 팩트(fact)다. 그는 부제가 ‘역사 측면에서 본 개발 전략’인 『사다리 걷어차기』(2002년)에서 부자 나라들이 무역장벽과 같은 보호주의 정책을 포함해 시장에 간섭하는 정책으로 부자 나라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무역기구·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을 동원해 가난한 나라들이 시장 간섭 정책을 펼 수 없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시장을 위해 할 수 있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실효성 없는 신자유주의를 강요해 개발도상국들의 가난 극복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또한 부제가 ‘자유무역 신화와 자본주의 비사(秘史)’인 『나쁜 사마리아인들』(2008년)에서는 통제되지 않는 자유시장경제가 경제를 개발하는 데 있어 거의 성공하지 못해 결과가 보호주의 정책보다 훨씬 나빴다고 주장했다.

장하준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심화하고 전선(戰線)을 확장했다.

장 교수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공공연한 비밀 23가지는 ‘반직관적(counterintuitive)’이다. 반직관적이라는 것은 직관(直觀)이나 상식에 입각한 예상과 다르다는 뜻이다. 장 교수는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자유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계획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라는 테제로 신자유주의의 허상을 폭로한다. 한편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처음 들었을 땐 어리둥절하게 하는 주장으로 지식경제사회의 도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헤게모니가 흔들리면 헤게모니를 지탱하는 학문도 흔들린다. 월 스트리트발 국제 금융위기로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자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도전도 거세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도전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선봉에 장하준 교수가 있다. 영국의 명품 유력지 가디언은 9월 29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는 정치인들”에게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권했다. 장하준 교수가 영국 정치인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의 원천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학문적 계통이 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1723~1790)가 아니라 독일 태생의 미국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1789~1846)와 리스트에게 영향을 준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미국 제헌회의 뉴욕 대표(1787), 초대 재무장관(1789~95)을 지낸 인물이다. 장 교수 저작의 세계적 인기는 리스트와 해밀턴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사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2007년 9월 1일 장 교수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해밀턴의 부싯돌식 발화총(flintlock)을 집어 든 가장 최근의 사상가는 케임브리지대의 장하준이다. 그의 책은 해밀턴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간의 200년 된 결투를 끝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코노미스는 해밀턴과 리스트의 경제론을 ‘구식총’에 비유했지만 아직 논란의 승자가 없다는 것은 인정했다. ‘구식총’에 담긴 주장은 무엇일까.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보호무역을 통한 국내 산업 보호와 경제 발전 단계설을 주장했다. 그는 세계에 자유무역주의를 전파하려는 영국의 의도를 의심했으며, 독일은 애덤 스미스의 이론이 아니라 영국의 실제로 실천하고 있는 경제정책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4년 이전에 리스트와 마르크스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독일 경제학자이자 경제개발 이론가였다. 리스트를 부활시킨 장하준 교수도 인기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장 교수는 언어학자·정치운동가인 노엄 촘스키, 아일랜드의 가수이자 배우인 밥 겔도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장 교수의 지지층은 다양한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다. 우선 그가 활동하고 있는 영국에선 중도 좌파 언론과 노동당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 특히 가디언과 가디언이 발행하고 있는 일요신문인 옵서버는 장 교수를 즐겨 인용하고 있다. 그가 개발도상국의 보호주의와 개발국가
(developmental state)를 옹호함에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인도네시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지식인들이 장 교수를 국내 논쟁을 위해 인용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 언론과 장하준 교수의 호감은 쌍방향이다. 장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라는 테제를 던졌으며 2007년 10월 3일 타임스 기고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강해야 하며 유럽과 유럽 경제학자들의 압력에 저항해야 한다.
다음 세대 사람들은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감사할 것이다.” 중국도 장 교수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있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영자지인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의 7월 14일자 보도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의 보호주의를 주창하는 장 교수는 베이징에서 큰 감탄의 대상”이다.

장 교수는 ‘그들이’ 치워버린 사다리를 세계의 가난한 나라들에 되찾아주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정부가 산업 정책으로 경제적 승자를 고를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개발도상국들에 과거 권위주의시대 한국의 정경유착을 ‘수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민주적인 개발국가를 발전시키는 것은 장 교수가 제기하는 대안에서 숙제 중 숙제다.

장 교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그는 가디언지 4일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좌파
와 우파의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성공적인 정당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우파·좌파 간 경계를 재설정하는 정당이다.” 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저술한 이유도 ‘능동적 경제시민’에게 필요한 지식을 주는 것이다. 특정 정파를 선동하거나 결집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저술이 중도좌파적 경제발전 모델이나 사회민주주의 지지자들에게 더 인기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계의 우파에게 매력 있는 ‘우편향’ 공공지식인을 양성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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