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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의 올곧은 기상 (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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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조선 중기의 뛰어난 학자이자 교육자였던 남명 조식의 영정 사진. 경(敬)과 의(義)를 함양하고 실천할 것을 강조했던 그의 학풍과 교육관은 16세기 조선에서 아주 이채롭고도 소중한 것이었다.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제공]

“전하의 국사(國事)는 이미 글러먹었고 나라의 기반은 이미 무너졌으며,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나고 백성들의 마음도 이미 멀어졌습니다…말단 관리들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고관들은 위에서 어물거리며 뇌물을 챙겨 늘리는 데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궁궐의 신하들은 당파를 심어 안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지방의 관리들은 백성들을 착취해 밖에서 이리처럼 날뛰니 살갗이 닳아버리면 터럭이 붙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자전(慈殿)은 생각이 깊지만 구중궁궐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 어린 일개 고아일 뿐입니다. 천재(天災)가 수없이 일어나고 민심이 끝없이 갈라진 것을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1555년(명종 10) 11월, 경상도 단성현감(丹城縣監) 조식(1501~1572)이 올린 상소의 내용이다. 나라 정치가 엉망이라 백성들의 고혈이 다 빨려버린 현실에 대한 추궁이 신랄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당시 실권자였던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를 ‘궁중의 일개 과부’로, 국왕 명종을 ‘일개 고아’라고 지칭한 점이다. 국정을 농단하고 있던 문정왕후와 왕후에게 휘둘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명종에게 그야말로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상소를 읽은 명종은 진노했다. 그는 조식이 자신과 문정왕후를 비판하는 불경을 저질렀음에도 승정원에서 상소문을 그대로 올려 보낸 것을 문제 삼았다. 이어 “임금을 공경하지 않은 죄를 다스리고 싶지만 ‘숨어 있는 처사(處士)’이므로 불문에 부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의 부덕(不德)을 헤아리지 못하고 대현(大賢)을 조그만 고을의 수령으로 삼으려 한 것이 부끄럽다”며 비아냥거렸다.

 명종이 조식을 단성현감에 임명한 것은 1555년 10월 11일이었다. 명종은 그전에도 처사 조식의 명성을 듣고 벼슬을 주겠다고 여러 차례 불렀었다. 하지만 조식은 좀처럼 응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조식은 단성현감에 임명된 지 한 달여 만에 사표를 내던지며 자신과 모친을 통박했다. 벼슬하지 않겠다는 처사를 자신이 먼저 불렀으니 처벌할 수는 없고, 궁벽한 시골의 선비에게 모욕을 당한 분은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명종은 ‘조식이 미관말직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투정을 부린 것’ 쯤으로 자위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명(南冥) 조식이 ‘희망이 없다’고 진단을 내렸던 명종대(1545~1567)는 어떤 시대였던가. 한마디로 척신정치(戚臣政治)가 판을 치던 때였다. 명종이 열두 살에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전권을 휘둘렀고, 그 와중에 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의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계속>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