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해일에 휩쓸려 가는 장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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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헌재씨가 우여곡절 끝에 경제부총리에서 물러났다. 26년 전의 부동산 매입문제가 경제부총리라는 자리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그런 해프닝이 하도 자주 일어났던 터라 별로 놀랄 일도 못 된다. 정작 주목할 일은 따로 있다. 이헌재씨의 퇴진과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쓴 것이다. 그의 사표수리에 대해 "참으로 송구스럽다"는 사과와 함께 "해일에 휩쓸려 가는 장수를 붙잡으려고 허우적거리다가 놓쳐버린 것 같은 심정"이라고까지 했다. 전에 없던 일일뿐더러 내용 또한 딱딱한 공문서가 아니라 수필 쓰듯이 애절하게 써내려 갔다. 도대체 노 대통령의 이 부총리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각별했기에 그의 경질을 쓰나미 대재앙에 비유하면서까지 안타까운 속내를 강조했던 것일까.

편지의 요지는 노 대통령으로서는 이헌재 부총리를 그만두게 할 생각이 전혀 아니었는데 여론이 하도 비판적이라서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수리했다는 내용이다. 인사권자로서 여론에 밀린 것이 부끄럽다는 사과문의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실제 내용에는 여론의 야속함을 탓하는 서운함과 변명의 의도가 뚜렷이 읽힌다.

매우 이색적인 대국민 담화문이었다. 그것도 사이버 대통령답게 인터넷통신의 형식을 취했고, 표현도 아주 감성적이어서 많은 국민에게 널리 읽혔을 것이다. 가슴이 찡한 내용이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대통령의 인간적 고민을 이해했다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이 특별한 편지에 대해 의외라고 느꼈을 사람도 많았던 것 같다. 어쩌면 이헌재씨 자신부터 매우 당황스럽고 뜻밖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대통령이 나를 그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단 말인가"하고 의아해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이 부총리는 재임 중에 결코 행복한 경제부총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신임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산하 기관장 하나 쓰는 데도 실세 인물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경제부총리 외에도 교육부총리.과학부총리가 따로 있는 데다 정치인 실세 장관과 실세 측근들이 죄다 한 목소리씩 하는 판에 애로가 적지 않았던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던 사실이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이 부총리 자신도 재임 중에 여러 차례 좌절을 겪고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부총리가 재임 중에 고전한 것은 경쟁자나 라이벌이 그를 견제해서가 아니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판을 그렇게 짜고 인사 포진이나 운영을 그렇게 해나갔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경제의 총괄 지휘탑은 경제부총리가 아니라 노 대통령 자신이었다. 시스템을 중시한다는 명분 아래 역할과 기구를 분산시켰고, 이 부총리가 재무관료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해 측근 학자들로 견제하는 노 대통령 특유의 용병술을 계속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해일처럼 밀려온 여론 앞에 책임의 소재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장수를 떠내려 보내는 것은 인사권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그의 사임을 애석해했으니 참으로 의외다. 그를 떠나보내는 불가피성을 천재지변에 비유할 정도로 대통령의 심정이 절박한 것이었다니 그동안 대통령과 경제부총리의 관계가 잘못 알려져도 크게 잘못 알려져 왔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어쨌거나 이번 일로 노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더 분명해졌다. 여러 차례 반복되어 왔지만 여론의 향방이 첫째 관건이다. 이 부총리를 경질한 것을 여론 탓으로 돌렸지만, 이와 관련해 '특별편지'를 썼던 것 역시 여론을 의식해서였다. 후임 경제부총리를 뽑는 과정이나 방법을 봐도 첫째도 여론이고 둘째도 여론이다. 여론을 떠보는 일도 좀 기술적으로 은밀하게 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노골적이고 서툴러서 거론되는 사람마다 민망하게 만든다. 누가 봐도 적임자를 뽑으려는 게 아니라 트집 안 잡힐 사람을 고르겠다는 의도가 너무도 뻔히 들여다보인다. 이런 식으로 뽑으면 설사 유능한 인물이 뽑혔다 해도 그 사람은 공연히 무능한 사람 취급받기 딱 알맞다. 사람 뽑느라고 시간 보내고, 뽑은 사람 내보내느라고 이처럼 시간 보내는 정부는 처음 본다. 일하는 데 보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계속 반복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이장규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