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즐겨읽기] 짧지만 긴박한 환상들 라틴문학의 진수 음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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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
실비나 오캄포 지음, 김현균 옮김,
열림원, 248쪽, 1만원

아르헨티나 여성작가 실비나 오캄포(1903~93)의 단편들을 읽은 소감은 공포영화를 보고 나온 느낌과 비슷하다. 라틴 환상문학의 계보에서 불온하고 잔혹한 상상력으로 알려진 작가라는 소문은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귀족 부인이 양재사 여인과 하녀의 도움을 받아 새 벨벳 드레스를 맞춰 입는다. 양재사와 하녀는 옷을 맞추는 내내 깔깔댄다. 그러다 부인이 덜컥 죽는다. 드레스가 온 몸을 졸라 죽인 것이다. 그래도 살아있는 여인들은 계속 웃는다. 그렇게 '벨벳 드레스'란 소설이 끝을 맺는다. 밧줄을 갖고 놀기를 좋아하는 소년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뱀으로 변한 밧줄에 물려 죽는다는 '밧줄'이란 단편도 있다. 책에 실린 18편의 단편 모두 이런 식이다.

소설가 성석제씨가 200자 원고지 한장 분량의 단편 소설을 썼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것도 소설이냐" 물었더니, "라틴 문학에선 이미 50년 전에 시도된 것"이라고 답했다. 오캄포의 단편이 꼭 그렇다. 표제작은 단 세쪽이다. 극히 짧은 이야기는 긴박하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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