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갈증 풀어준 마음의 고향 … 빔 벤더스와도 만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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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호 20면

70년대 뒷자락은 그야말로 캄캄하고 얼어붙은 때였다. 긴급조치라는 서슬 퍼런 어둠이 드리워 살림은 팍팍했고 삶터는 을씨년스러웠다. 공부고 문화예술이고 그 어디 하나 바라 볼 데도, 마음 둘 데도, 딱히 기웃거릴 데도 마땅치 않았다. 어둠에 지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적어도 공부나 문화예술 쪽으로 포근하게 곁을 내주고 따뜻한 빛을 비추던 곳이 바로 외국 문화원이었다. 어느 문학 평론가의 말대로 안팎으로 궁핍하고 고단한 젊은이들의 ‘새것 콤플렉스’를 키워주고, 달래주었던 때문일까.

암울한 70년대 외국과 통하던 문 독일문화원

나도 대학(서강대)에 들어가자마자 선배들 손에 끌려 남산의 독일문화원이란 데를 찾았다. 독문학이 전공이니, 그저 독일어라도 착실하게 배워 이 추운 땅을 벗어나보려는 알량한 욕심에서 시작한 공부가 독일 문화, 유럽 문화 전반에 대한 공부로 뻗어갔다. 당시 구경도 하기 어려운 책들과 자료들로 빼곡한 문화원의 도서관은 나의 문화적 갈증과 지적 호기심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독일인 교사들이 전해주는 은근한 독일풍 아우라에 빠져 대학에서보다 공부는 더 착실하게 했던 것 같다.

사회과학 서적을 독일어로 읽는 사이, 짐짓 덮어둔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도 되살아났다. 나중에 ‘뉴 저먼 시네마’로 알려진 독일 전후 세대 영화와 만난 것도 이때다.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문화원 영상실에서 유럽 예술영화에 담긴 치열한 자유정신과 상상을 뛰어넘는 미적 표현력에 흠뻑 빠져들어 있을 때였다. 당시 한국 영화는 열악한 제작환경과 검열로 참담한 지경이었다.

1978년, 오랜 침잠 끝에 막 떠오르기 시작한 독일의 빔 벤더스 감독을 만났다. 독일 문화원에서 그를 초청, 특별 상영행사를 연 것이다. 보조 통역일을 맡은 것은 행운이었다. 벤더스 감독을 가까이 했고,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내로라 하는 인물들인 김홍준 감독과 부산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전양준,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만났다. 당시 김홍준과 전양준은 대학생이었고, 정성일은 ‘고3’이었다.

이 바람에 작은 영화집단도 만들었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같은 영화를 보며 팔자에 없는 변사(더 정확하게는 ‘자막을 번역해 읽어주는 사람’) 노릇까지 하고, 독립영화 현장에도 슬며시 끼어들기도 했다. 79년엔 처음 한국을 찾은 피나 바우쉬의 춤을 보고 그 감흥에 며칠을 어쩌지 못했던 것이 지금까지도 내 오감에 뚜렷이 남아 있다. 80년 독일로 떠나 낯선 땅에서 남들이 먹다 버린 지식의 찬밥덩이나 구걸한 게 10년 세월을 넘겼다. 다시 돌아와 대학에 자리 잡기까지 몇 해, 어렵고 힘든 세월 독일문화원은 거듭 내 작은 쉼터, 일터가 되어주었다.

2007년 벤더스 감독이 서울을 다시 찾았을 땐 78년 당시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과의 조촐한 자리가 마련되기도 했다. 30년 성장사를 지켜본 독일문화원이 꾸민 일이다. 며칠 전 영상자료원에서 독일문화원과 함께 독일 고전영화를 다시 보는 행사가 열렸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상영할 땐 내가 다시 변사가 돼 옛 추억을 되살렸다.

요즘 독일문화원은 독일어에 대한 관심이 적어서인지 예전처럼 북적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독일문화원이 갖는 아우라, 우리 문화계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다른 나라의 문화예술, 언어를 배우고 알며, 그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는 굳이 지구화 시대여서가 아니더라도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올해 대학에 들어간 내 아이도 얼마 전부터 자주 독일문화원을 드나든다. 대를 잇는다고 해야 할까.

문화예술, 특히 영화와 관련된 내 존재의 8할을 키워 준 ‘고향’인 독일문화원은, 오랜 전통과 노하우로 척박했던 이 땅의 지식·문화 예술계에 제법 거름이 돼 줬던 게 사실이다. 세월은 흘렀다. 남산의 독일문화원이 단장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문을 연다고 한다. 산책하듯 가볍게 문화원으로 나들이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부지런히 드나들며 70·80년대의 ‘새것 콤플렉스’가 아닌 ‘다름’에서 ‘새로움’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스스로 풍성해지고 존재가 확장되는 경험을 맛볼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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