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전 옷 벗겨라” … 영국군 ‘고문 교본’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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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질문하기 전에 일단 옷부터 벗겨라. 눈과 귀를 가리고 수갑도 채워라. 장소는 외부와 단절된 선박 컨테이너가 이상적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입수한 영국군 신문 교본 내용이다. 가디언은 영국군이 전쟁포로 등 수감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반인권적 신문 기법으로 학대를 가해 정보를 캐내 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25일(현지시간) 전했다. 신문은 “이는 1949년 제정된 뒤 전쟁포로에 대한 육체적·정신적 강압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제네바협약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2005년 작성된 교본엔 “질문하기 전 수감자 옷을 벗겨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벌거벗은 상태로 두고, 성기나 엉덩이를 살펴보는 행위로 수치심을 줄 것”이란 내용이 나온다. 또 다른 교본은 “수갑이나 눈가리개·귀마개 등으로 수감자의 시청각 감각을 제한해 육체적인 불편과 공포감을 주라”고 신문자에게 권장하고 있다. 또 “매일 8시간 취침 및 휴식을 허용해야 하지만 한 번에 잘 수 있는 시간은 4시간만으로 제한하라”는 지침도 있다.

 가디언이 이번에 공개한 교본들은 2003년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영국군의 고문으로 이라크인 바하 무사가 숨진 이후 작성된 것들이다. 이라크 주둔 영국군이 이라크인들에게 가한 비인권적 행위들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정부와 군은 바하 무사 사건 당시 군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조사를 해 사건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바하 무사 사건 이후에도 군은 고문에 준하는 신문기법을 계속 사용하고 교본까지 작성해 신문관들을 교육해 온 것으로 보인다. 가디언은 “이번 교본에 2008년 1월 이라크 민간인 인권침해에 관한 군 조사가 완료된 이후 작성된 것도 있다” 고 전했다.

 다음 달 영국 고등법원에선 2003년 3월부터 2007년 4월까지 영국군에 의해 체포된 뒤 신문받은 이라크 민간인 100여 명이 군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변호인단이 전기고문, 성적 수치심을 느끼도록 포르노 DVD 시청 강요, 수면 방해 등 영국군이 자행한 각종 고문 사례들을 법정에서 공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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