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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의 차이니즈 리더십] 중국 차기 1인자 ‘시진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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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하동 십년하서(十年河東 十年河西).’ 황허(黃河)의 물이 10년은 동쪽으로 흘렀다가 또 다른 10년은 서쪽으로 흐른다는 말이다. 세상 일이란 게 어느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걸 일깨워준다. 시진핑(習近平·57)이 18일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올랐다. 13억 중국의 1인자가 되기 위한 3개의 포스트 중 당(정치국 상무위원, 서열 6위)과 국가(부주석)에 이어 군에서도 마지막으로 후계자 준비를 마쳤다. 시진핑의 등장은 후진타오(胡錦濤) 정권과는 다른 세력의 부상을 의미한다. 후 주석의 권력 기반이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이었다면 시는 태자당(太子黨·중국 고위 관료 자제 그룹)이다. 후 주석이 분배를 외치고 있다면 시는 분배와 함께 성장 또한 외칠 것이다. 시는 후의 전임자였던 장쩌민(江澤民)과 맥이 닿아 있다. 10년을 주기로 지도자가 변하면서 중국의 흐름에 다시 변화가 일 전망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3년 전 후진타오에게 밀려난 쩡, 치밀한 기획으로 ‘킹 메이커’ 역할

시진핑

시진핑의 오늘을 기획·제조한 주역은 바로 장쩌민의 오른팔로 불리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 부주석이다. 쩡은 후진타오 집권 1기(2002.11~2007.10)에 후진타오-원자바오(溫家寶) 등과 함께 트로이카를 형성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2007년 10월 개최된 제17차 당 대회에서 탈락한다. 67세 이상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수 없다는 연령 규정이 도입되면서 밀려났다. 연령 규정이란 사실상 명분일 뿐 타협과 갈등, 암투가 난무하는 복잡한 권력 게임에서 패배한 것이다. 후로서는 자신을 압박하던 장쩌민 세력의 대표 주자를 제거한 셈이었다. 당 서열 5위이자 국가 부주석이었던 쩡은 부단히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노렸다. 성사될 경우 후의 유고 시 언제든 1인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고 후진타오 집권 2기에 합류치 못하게 됐다.

 쩡은 퇴진에 앞서 후진타오 10년 이후의 강산을 되찾아 올 인물을 물색했다. 평소 선대부터 집안 간 왕래가 있던 시진핑이 부각됐다. 둘은 1970년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함께 근무한 적도 있었다. 쩡은 부총리 위추리(余秋里)의 비서로, 시는 국방부장 겅뱌오(耿<98C8>)의 비서로서였다. 장쩌민 집권 초기 양상쿤(楊尙昆)-양바이빙(楊白<51B0>) 형제의 군부세력인 양가장(楊家將)을 깨고, 또 베이징(北京)파의 천시퉁(陳希同) 세력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낸 게 쩡칭훙 아니었던가.

 쩡은 시진핑을 차기 지도자로 옹립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2007년 6월 베이징의 중앙당교(中央黨校)에서는 최고위 간부 400여 명이 참석한 당원지도간부회의(黨員指導幹部會議)가 개최됐다. 차기 정치국 위원으로 누가 좋은가에 대한 추천 투표가 진행됐다. 그 결과 상하이 당서기이던 시진핑이 1위를 차지했다. 쩡의 치밀한 계획이 작용한 결과였다.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하는 건 우리가 당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표준이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 시진핑을 강력하게 밀면서 쩡칭훙이 했던 말이다. 순식간에 후진타오에 의해 1인자로 양성되던 리커창(李克强)이 시진핑에게 추월당하는 순간이었다. 쩡은 자신이 중국의 최고 집단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물러나면서 시진핑, 허궈창(賀國强·서열 8위) 당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저우융캉(周永康·서열 9위) 당중앙정법위원회 서기 등 세 명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시진핑, 중국 각 파벌이 받아들이기에 가장 무난하다는 평가

시진핑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서열 6위, 라이벌 리커창은 7위로 입성했다. 이제 예선전이 끝나고 본선에 해당할 후계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은 두 사람의 경쟁 관계를 비유하는 우스개 이야기 한 토막. 시진핑과 리커창이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그러자 시가 신발끈을 고쳐 맸다. 이를 보고 리가 비웃었다. 신발끈을 조인다고 호랑이보다 빠를 수 있겠는가라고. 시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호랑이보다 빠르진 못해도 당신보다는 빠를 것이라고. 리청(李成)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손턴차이나센터 연구주임이 소개한 내용이다.

 시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뒤 쩡칭훙이 차지하고 있던 요직을 두루 물려받았다. 홍콩·마카오 담당소조 조장에 이어 중국 엘리트 배출의 요람인 중앙당교 교장이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8년 3월 국가 부주석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2년 동안 리커창보다 빨리 뛰기 위해 노력했다.

 주위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쩡칭훙이 강조했듯이 중국의 각 파벌이 지도자로 받아들이기에 가장 무난한 인물이라는 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창의적이지 않을지 몰라도 침착하고 중후해 안정감이 있으며, 재능이 뛰어나지 않을지 몰라도 나름대로 패기가 있다는 것이다. 또 급진적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보수적이지도 않아 중국의 다양한 계파를 두루 감쌀 수 있다는 장점이 돋보였다. 특히 부총리를 지낸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의 후광은 넓고도 깊었다. 태자당만이 시를 지지하는 게 아니었다. 원로인 장쩌민, 차오스(喬石) 전 전국인민대표대회(국회 격) 상무위원장은 물론 심지어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 모두가 시중쉰을 존경하고 또 얽히고설킨 인연으로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에겐 또 평민의 냄새가 난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중국에 “재상은 주부(州部·지방)에서 시작해야 하고, 맹장은 병졸에서 발탁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시는 문혁 당시 산시(陝西)성 농촌에서 “기절할 만큼 고된 노동”을 했다. 7년간이나. 이때 “누가 민중인지, 그리고 무엇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인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허베이(河北)성과 푸젠(福建)성에서는 기층 간부로 19년 동안 실무 경험을 쌓았다. 시는 또 차세대 리더 후보군 중 유일하게 군복을 입었던 인물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은 1989년 천안문 사태 뒤 장쩌민을 후계자로 키우면서 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5일 일하는 동안 4일은 군 지도부와 함께 보낸다”고. 군의 지지 없이 권력 장악은 없다는 얘기다. 중앙군사위 판공실 비서로 3년 동안 현역으로 근무한 경험은 그에게 큰 자산이었다.

 그럼에도 1인자 후보가 장악해야 할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지난해 가을 열린 제17차 중국공산당 4차 전체회의(4中全會)에서 예상을 뒤엎고 부주석에 오르지 못했다. 쩡칭훙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외부에선 시가 후계자 경쟁에서 밀리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잇따랐다. 홍콩 언론을 통해 시가 스스로 부주석 자리를 고사했다는 변명을 흘렸지만 외부의 추측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올해 5중전회에서도 시가 군사위 부주석에 오르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가 돌았다. 9월에 북한에서 김정은이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됐는데 한 달 후 시가 군사위 부주석이 되면 중국이 북한을 따라 하는 것 같아 모양새가 우습지 않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차세대 후계 체제 확립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대세론 속에 시는 18일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오름으로써 사실상 2012년 가을의 제18차 당 대회에서의 1인자 자리를 예약했다.

“시, 분배보다 성장 강조할 것 … 동부 연안의 발전 지역 중시”

18일 폐막된 5중전회에서는 제12차 5개년 계획(2011~2015년)에 대한 건의서가 채택됐다.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수출 중심에서 내수 중심으로, 고에너지 소비에서 저에너지 소비로, 국가의 부(富) 증대에서 민간의 부를 늘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포용성 성장으로 사회정의 실현과 분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성장보다는 분배를 강조해 온 후진타오 정권의 일관된 계획이다. 그러나 시가 등장하면 분배도 분배지만 성장을 보다 강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리청 박사는 “시는 태자당과 동부 연안 발전 지역의 이익을 중시할 것”이라고 말한다. 장쩌민과 정책적 맥이 닿아 있어 발전을 더 추구하면서 자연히 외자 기업과의 관계도 후진타오 정권에 비해 더 개선될 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총리 자리를 맡을 것으로 알려졌던 리커창의 입지가 최근 많이 흔들리면서 역시 태자당 출신의 왕치산(王岐山) 부총리가 총리에 오르면 이 같은 기조는 더욱 강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근 원자바오 총리가 강조하는 정치개혁과 관련해서는 서방이 기대하는 다당제 등의 정치체제 개혁이 아니라 공산당 내의 민주화를 추구할 것으로 관측된다. 시의 등장 이후 남북한 관계 기조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입장에서는 남북한 모두 중국에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 등거리 외교를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2008년 6월 국가 부주석이 된 지 3개월 만에 첫 해외 방문지로 북한을 선택했다. 장쩌민 역시 당 총서기가 된 후의 첫 방문국이 북한이었다. 한편 시의 등장에 일본은 긴장하고 있다. 일본은 리커창 부총리의 동북 지역 발전 계획을 지지하면서 그동안 리에게 공을 들여온 데다 시가 대일 강경책을 구사했던 장쩌민과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은 시의 등장에 기대가 많다. 시가 미국에 적지 않은 친구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중국의 제5세대 집단지도부의 리더로서 시는 이변이 없는 한 2012년 가을부터 10년 동안 중국을 통치할 것이다. 그의 임기 말인 2021년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해다. 2021년 7월 1일의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저 아시아의 대국으로서 만족하는 중국일까, 아니면 미국을 능가할 기세로 욱일승천하는 중국일까. 시진핑의 어깨에 큰 짐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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