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민 달래려던 ‘낙지 데이’ … 어민들 “희롱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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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낙지 데이’로 정한 20일 시청 구내식당에서 직원들이 점심 메뉴로 나온 ‘낙지 생야채 비빔밥’에 낙지를 옮겨 담고 있다. 서울시는 이날 점심식사를 위해 전날 전남 무안에서 산낙지 2700마리를 공수해 왔다. 이날 식탁엔 먹물과 내장이 제거된 낙지가 올려졌다. [조용철 기자]

‘우리 낙지 참 맛있어요’.

 20일 오전 서울 서소문동 시청 구내식당 ‘소담’ 정문에 걸린 플래카드 문구다. 낮 12시쯤 되자 이 플래카드 아래로 200m의 긴 줄이 생겼다. 서울시가 ‘낙지 데이(day)’를 기념해 준비한 ‘낙지 생야채 비빕밥’을 먹으려는 시청 직원들이다. 송은숙(46·6급)씨는 “낙지 비빔밥이 특식으로 제공된다는 공지를 보고 일부러 식당을 찾았다”며 “평소보다 줄이 길어 놀랐는데 이 줄처럼 낙지 먹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570석 규모의 식당 안은 일찌감치 자리를 맡은 사람들로 꽉 찼다. 이들은 큼직한 그릇을 앞에 놓고 채소와 삶은 낙지를 고추장과 함께 비비느라 바쁘다. 서울시가 낙지 비빔밥을 위해 공수한 낙지는 2700마리다. 모두 전남 무안산이다. 그릇당 한 마리 반씩 넣어 1800그릇을 준비했다. 구정희(36) 영양사는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이 왔기 때문에 준비한 비빔밥이 40분 만에 동이 나 못 먹고 돌아간 직원도 있다”고 말했다.

20일 서울 성동구청 구내식당에서 산낙지 시식회가 열렸다. 구청 직원들이 낙지를 통째로 먹고 있다. 이날 시식회에는 전남 무안산 낙지 400마리가 제공됐다. 성동구는 낙지 먹물과 내장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점을 알려 낙지 소비를 늘리겠다는 취지로 이날 행사를 마련했다. [뉴시스]

 서울시가 낙지 파동으로 들끓는 어민 달래기에 나섰다. 최근 낙지 중금속 검출 논란으로 낙지 소비가 줄었다는 어민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소비 촉진 행사에 나선 것이다. 오세훈 시장은 8일 전남 무안·신안 지역의 어민을 만나 낙지 성분 발표는 불가피했지만 앞으로 다양한 낙지 소비 촉진 운동을 하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낙지 머리에 든 먹물·내장은 인체에 해롭다는 서울시의 입장은 변함 없다. 낙지를 통째로 넣어 끓이는 ‘연포탕’ 대신, 머리에서 내장·먹물을 제거하고 조리하는 ‘낙지 비빔밥’을 낙지 데이의 메뉴로 고른 배경이다.

 그러나 서울시의 이 같은 낙지 행사에 낙지의 주산지인 전남 무안·신안·장흥군 등의 주민들은 환영은커녕 불처럼 화를 내고 있다. 양태성(44) 신안갯벌낙지 영어조합법인 대표는 “서울시가 낙지 홍보를 해 준다더니 내장·먹물을 빼고 요리한 음식을 일부러 내놓아 낙지 머리가 유해하다는 점만 재확인하며 어민을 희롱했다”며 격분했다.

 서울시에 낙지를 공급한 무안군 낙지 어민·상인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인근 낙지잡이 어민들이 “왜 서울시에 낙지를 공급했느냐”고 거세게 항의하고 있어서다. 박종균 무안군 해양자원 담당자는 “서울시가 15일 낙지 소비와 판촉을 위해 낙지 시식회를 하겠다며 낙지를 공급해달라고 요청할 때는 머리에서 내장·먹물을 빼낸 채 조리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며 “우리 어민들도 속았다며 격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종현 서울시 대변인은 “수천 명의 직원이 구내식당에서 연포탕을 끓여 나눠 먹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고 골고루 한 마리씩 먹기 위해 비빔밥을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변인은 “낙지 판매가 늘 때까지 소비 촉진 운동을 이어가겠다는 서울시의 마음을 어민들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폭락하는 낙지 가격에 어민들의 한숨도 늘고 있다. 무안군 낙지는 지난해 이맘때쯤이면 20마리 한 접당 5만원 안팎에 거래됐으나, 낙지 파동 이후 3만5000원~4만원에 그치고 있다. 박종태 장흥군낙지통발협회장은 “건강식품으로 각광받던 낙지를 서울시가 혐오식품으로 전락시켜 값이 폭락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전남 신안·무안·장흥 등의 낙지잡이 어민 700여 명은 25일 오후 1시부터 서울시청 별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할 예정이다.

 한편, 성동구는 이날 점심시간에 전남 무안군에서 공수한 세발낙지 400마리를 날것 그대로 먹는 시식회를 열었다. 고재득 구청장은 “낙지가 인체에 해롭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낙지 먹물과 내장까지 통째로 먹는 시식회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글=이해석·한은화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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