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10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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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그냥 장롱 문을 밀고 나오려다가 경대 옆에 놓인 제니스 라디오를 보았다. 손잡이를 잡아 들어올리는데 한쪽 어깨가 휘청 기울어질 정도로 제법 무거웠다. 내 방으로 돌아오니 성진이는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를 흔들어 깨웠다. 성진이가 가늘게 억지로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고 내가 속삭였다.

-다 끝났어. 나가자….

성진이는 머리를 호되게 흔들더니 일어나 안장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나는 얼른 가지고 나온 핸드백을 열어 보았다. 지폐 뭉치가 꼭 하나였는데 그걸 모두 가져갈 수는 없었다. 나는 절반만 빼내어서 호주머니에 쓸어 넣고 나머지는 핸드백 안에 다시 넣어 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눈에 잘 띄도록 내 책상 가운데에 얌전히 놓았다.

-내 가방 좀 들어줄래? 나는 이걸 들어야겠어.

성진이는 내가 안방에서 들고 나온 제니스 라디오를 보고는 혀를 쑥 내밀어 보였다. 라디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것은 우리 집의 유일한 문화시설이었다. 당시만 해도 텔레비전은 아직 없었고 전축 따위도 칠십년대가 넘어서야 장롱이나 가구 비슷한 꼴로 혼수품이 되어 등장했다. 더구나 그것은 라디오 시대의 마지막 첨단제품으로 미군 피엑스를 통해서 흘러나왔다. 뚜껑을 열면 전세계 각 지역의 방송 채널이 모두 표시되어 있었다. 누나들이나 어머니는 '청실 홍실'이니 '눈은 내리는데''현해탄'같은 당시의 라디오 연속극을 즐겨 들었다. 우리는 까치발 걸음으로 현관 마루를 지나 집 밖으로 빠져 나왔고 언덕을 정신없이 내려왔다. 노량진 고개를 넘어갈 무렵에야 안개 속에 날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성진이나 나는 길을 떠나면서 우리가 적어도 한 석삼년은 지리산 자락에 파묻혀 살다가 돌아올 줄로 스스로 믿고 있었다. 시내로 들어가서 우선 허름한 여인숙에 들어가 모자라는 잠을 자기로 했다. 나는 긴장이 풀려서였는지 온 삭신이 풀려 버렸다. 일어나자마자 성진이가 짐을 덜자고 성화가 심해서 남대문시장으로 나갔다. 전파상의 주인들은 우리가 커다란 라디오를 들고 들어서면 대번에 알아보는 모양인지 값을 후려 때렸다. 몇 군데를 돌아다니다 기중 나은 값을 부른 상인에게 라디오를 팔아넘겼다.

그날 늦은 밤에 우리는 서울역 대합실에서 전라선 야간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못된 짓을 저지르고 나면 차츰 더 걷잡을 수 없게 된다더니 나는 그야말로 수렁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높은 천장에 까마득하게 매달린 불빛도 희미했고 기다리는 시골 사람들의 모습도 한결같이 우중충했다. 웬 음침한 얼굴의 중늙은이 여인이 다가서더니 억지로 웃는 것같이 입만 옆으로 찢으며 말을 걸었다.

-학상들, 어디 가슈.

-남원요.

나는 그녀가 기차 노선을 묻는 줄 알고 그냥 무심코 대답했다.

-열한시 반꺼정 한참 남았구먼. 놀다 가지.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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