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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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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키 큰 몽골리안 - .”

 그녀가 나처럼 길게 꼬리를 끄는 말투로 받아놓고 다시 진지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자문했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사람을 한 번도 그런 인종적인 특성으로는 의식하지 못했지?”

 그 말에 내가 빈정거림 섞인 물음으로 받았다.

 “그게 바로 사랑의 묘약이라고 하는 거 아냐? 아니, 무식하게 말하면 눈에 명태 껍질이 확 덧씌워진 것이겠지.”

 하지만 그녀의 어조는 더욱 진지해졌다.

 “아녜요. 그건 뭔가 중요한 물음이 될 것 같은데요. 정말로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 한 번도 그 사람의 인종적인 특성을 의식해 본 적이 없다니까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었거든요.”

 “그렇다고 그게 뭐 그렇게 심각하게 따져볼 일이야 되겠어?”

 그녀가 너무 진지해지는 바람에 내가 슬그머니 물러나는 기분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뭔가 한번쯤 진중하게 따져봐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네요. 외모의 인종적인 특성이 나와 전혀 다른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게 이상하기는커녕 뭔가를 찾아야 할 곳에서 찾았다는 기분까지 들었다니까요. 이번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음악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싶을 만큼….”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제 고향 찾아간 금발의 제니가 우리 돌쇠를 찾으러 한국으로 되돌아왔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거 뭐야? 엘렉트라 콤플렉스 같은 거 아냐? 여자 아이가 자신과 어머니를 동일시하고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나 어쩐다나 하는 거. 혜련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혜련도 은연중에 한국 남자에게서 자신의 배우자를 찾은 것인지도 모르잖아?”

 “시시해요. 낡은 신화에 기댄 그 억지스러운 가설. 그 사람에게서는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어떤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 그녀의 진지한 대꾸에 다시 동화된 내가 떠올려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심리기제 가운데 하나를 신중하게 대보았다.

 “그럼 혈통으로 물려받은 어떤 친화감이나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익숙한 느낌 같은 거?”

 “그보다도 더 뿌리 깊고 본능적인 건데요-.”

 그녀가 다시 그렇게 끝을 길게 끄는 대답으로 말을 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이었다.

 “내가 우리 고지식한 감독님께 이런 소리 해도 될지 몰라. 하지만 그래도 이 얘기를 해야만 그 사람에 대한 내 감정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바로 첫 섹스 얘긴데요. 나도 그때 내 주변에 있던 미국 여자아이들의 평균치에 크게 벗어나지 않게 하이스쿨 때 처음 동급생 남자아이와 잤어요. 상대는 스코틀랜드 계통의 맥 라이언이란 이름을 가진 아이였는데, 성실하면서도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죠. 부활절 무렵 부모가 휴가를 떠나고 그 아이 홀로 남게 된 빈집에 우리 학교 상급반 친구 다섯 쌍이 모여 우리끼리의 작은 파티를 열었다가 그중 경험 많은 세 쌍의 유도로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나도 평소 그 남자아이를 좋아했고, 섹스도 그날 밤 분위기가 그렇게 몰리자 기꺼이 동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죠. 그런데도 그 집 거실에 다시 불이 밝혀지고 방방이 흩어졌던 쌍들이 다 되돌아와 다시 술을 마시게 되면서부터 이내 기분이 고약해지기 시작했어요. 무언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느낌, 아버지가 특히 엄격함을 드러내 보일 때의 표정과 경멸을 드러내는 어머니의 눈길 같은 것이 번갈아 머릿속을 스쳐가며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어요. 죄의식이란 게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죠. 결국 나는 내 파트너였던 남자아이를 몰아쳐 새벽 두 시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어요. 그리고 어머니의 눈길을 피해가며 두 번 세 번 샤워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알지 못했어요. 물론 그 남자아이하고는 그걸로 끝이었죠. 그 성실하면서도 수줍음 많이 타던 아이는 졸업 때까지 몇 번이나 얼굴까지 붉히며 사과했고, 나도 결코 그 아이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는데도, 섹스로는 두 번 다시 그 아이와 만나지 않았어요.

 똑같지는 않지만, 미국에서 사귄 두 번째 보이프렌드에게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2년 뒤 칼리지에 다닐 때였는데, 이번에도 상대는 당연한 듯 백인 청년이었죠. 하인츠란 성이 남은 독일계 공과대학생이었는데, 첫 번째와는 달리 몇 달은 몸과 마음 모두 그럭저럭 잘 어울렸어요. 그런데 졸업을 앞둔 어느 날 그가 불쑥 결혼신청을 하자 모든 게 달라졌어요. 갑자기 번쩍 정신이 들며, 첫 번째 섹스 뒤에 느꼈던 그 죄의식과 불결감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더군요. 내가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어쩌면 거기에 쫓겨서였는지 몰라요. 하지만 여기 와서는 2년도 안 돼 그 사람을 만났고, 만난 뒤 겨우 석 달 만에 진지하게 결혼을 의논하는 사이가 되었어요. 어쩌면 그런 내 의식의 근저에서 내가 그 사람의 인종적 특성에 전혀 구애되지 않았던 까닭을 찾아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하지만 솔직히 그때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서른다섯의 노총각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성적 경험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은 미혼의 젊은 여자 앞에서 끝내 태연할 수는 없었다. 애써 되살려낸 진지한 어조로 마음속의 충격과 혼란을 감추며 받았다.

 “그보다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혈통이나 국적은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으니까. 부계혈통 우선주의와 족외혼(族外婚)의 금기 같은 게 어우러져 빚어낸 강박관념이랄까. 쉽게 말하자면,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니까 너도 한국 사람이고, 그래서 네 배우자는 한국 사람으로 골라야 한다는 그런 강박관념 말이야.”

 그러자 비로소 그녀가 그간의 진지함과 긴장을 한꺼번에 툭툭 털어버리는 듯한 웃음과 함께 서울에서는 잘 쓰지 않던 부산 사투리로 눙쳤다.

 “아무리 울 아부지가 지를 부산 가스나 김혜련으로 키았지만, 그란다꼬 지가 그러코름 촌스럽기야 하겠어예? 다 그 사람이 우리 영감 될 인연이 있으이 그리 됐겠지예. 인자 마 그 얘기는 고마 하입시더.”

 그러고는 이따금 그러듯 선머슴아이 같은 큰 동작으로 술잔을 쳐들더니 남은 술을 단번에 죽 들이켰다.

 “하긴, 남의 영감 만난 얘기 너무 오래 했나? 그래, 나도 음악감독 만나러 온 연출이지. 우리 연극 얘기나 하자고.”

 나도 그렇게 맞장구를 치며 화제를 바꾸었으나 그 뒤의 얘기는 거의 기억나는 게 없다. 사실 그때쯤은 나도 빈속에 마신 술로 어지간히 취해 있었다.

 그 이튿날부터 다섯 달, 불같은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나는 연극을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크루서블’ 연출에 들어갔다. 비록 광복동 이면도로에 있지만, 이런저런 용도로 수요가 많은 건물의 삼층 60평을 모두 내주고 받은 전세금을 제작비에 털어 넣은 것처럼, 내 열정과 능력도 짜낼 수 있는 데까지 짜내 그 연극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나를 몰아가는 데는 시작이지만 또한 그것으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다져진 비장한 결의도 한몫을 했다.

 최선을 다한다는 점에서는 혜련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녀는 처음에 음악 연출을 맡을 때보다 몇 배의 열정으로 ‘크루서블’에 매달렸고, 결과는 그 어떤 공연에서보다 강화된 음악성으로 나타났다. 어떤 독백은 아리아로 바뀌고, 집단 광기도 코러스로 대치되었다. 그 자리를 여기저기서 억척스럽게 찾아낸 곡들로 편곡해 메워 가는 그녀에게 감탄하면서도 걱정스러워 한번은 농담처럼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이거 이러다가 뮤지컬 되는 거 아냐?”

 “이걸로는 어림없는 얘기예요. 하지만 이 연극, 그럴 수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네요. 나중에 좋은 곡 받아 뮤지컬로 바꾸면 그대로 대작이 될 거예요.”

 그녀의 놀랄 만한 열심과 집중에 대해서도 물어본 적이 있었다.

 “무리하지 마. 어째 연출보다 음악이 더 억척을 떠는 것 같아.”

 그러자 그녀는 무엇에 몰두하면 작은 불꽃이 이는 듯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저도 이게 시작이잖아요. 전문 음악감독으로 중앙무대에 데뷔하는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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