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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이민 100년] 中. 에네켄으로 모은 독립 자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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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 1920년대 시틴캅첸 농장에 세워진 한글학교의 어린이들. 가운데 검정 옷 아이는 책을 들고 있다. 어린이들의 표정이 다부진 게 인상적이다.

▶ 한인 1세대가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서재필 박사 등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받은 영수증.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다.

▶ 멕시코 이민 50주년을 맞은 1955년 메리다 국민회 간부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노동계약이 끝나가던 1909년 5월 초. 한인에겐 아픈 소식이 날아들었다. 일본이 조선을 삼키기 일보 직전이란 비보였다. 이들은 곧 대한인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를 설립했다. 4년이란 노동계약이 끝나기 사흘 전인 5월 9일이었다. 돌아갈 조국을 잃는 절망적 상황에서 멕시코 이민 1세대의 강인한 민족혼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 독립운동 지원=멕시코 정경연구소의 최준철 박사는 "메리다 지방회 창립엔 16개 농장에서 한 명씩 대표가 참가했으며 창립회원은 314명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한인의 상당수는 에네켄 농장에서 일을 계속하며 돈을 벌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67년 이민 온 장기철(68)씨도 장인 이순여씨가 독립운동을 열심히 도왔다고 회상했다. 7세 때 부모를 따라 멕시코에 온 이순여씨는 4년간 농장에서 부모님의 고생을 생생히 지켜봤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1910년 12세 때 수도 멕시코시티로 올라와 시계 고치는 기술을 배웠다. 5년 뒤엔 시계점을 차렸다. 가게가 번창하자 '라 코레아나'라는 금은방으로 확장해 큰돈을 벌었다. 장씨는 장인이 번 돈의 대부분을 샌프란시스코 국민회로 보내 독립운동을 도왔다고 말했다. 당시 국내 신문에 멕시코 이민자의 부음이나 애도사가 실린 것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도운 이들 이민 1세대를 높이 평가한 증거로 풀이되고 있다.

◆ 뿌리를 잊지 말자=조국을 잃은 한인은 우선 말을 지키기 위한 노력부터 했다. 전직 관리와 양반 출신 이민자는 한글학교를 운영하며 애국심을 고취했다. 또 메리다 남쪽의 오학기나에 제당공장이 설립돼 그곳으로 이주한 한인은 1913년 5월 오학기나 지방회(회장 김성민)를 설립했다. 그리고 후손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기 위한 일신국어학교(교정 이원석)을 세웠다.

학교에서는 한국의 역사와 지리, 산수, 체조, 찬송가 등을 가르쳤다. 밤에는 청년들이 모여 글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한글과 셈을 가르치기도 했다.

◆ 무력에 의한 국권회복 시도=1910년 11월에는 한인 밀집지역 메리다에 숭무(崇武)학교가 설립됐다. 조국의 군사력이 약해 한.일 합병이 이뤄졌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활동엔 대한제국 광무군 출신의 퇴직군인 200여명이 큰 힘이 됐다. 나라를 무력으로 되찾겠다는 의지로 세워진 이 학교엔 118명의 생도가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고종으로부터 해외 망명정부 건설이란 밀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조선 왕족 출신 이종오 선생도 숭무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와 관련, 멕시코 이민자 중 광무군 출신이 1916년 멕시코 인접국인 과테말라 지하 혁명군과 결탁해 일종의 망명정부인 '신조선'을 세우려는 야망을 펼쳤다는 기록이 실제로 남아 있기도 하다.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광무군 출신에게 군사적 협조를 요청하면서 혁명에 성공하면 그 대가로 '신조선'을 세울 부지와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멕시코 이민 1세대의 독립운동은 메리다를 방문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때문에 이들 멕시코 한인은 독립성금은 물론이고 한국전쟁 이후엔 조국의 난민을 돕기 위해 구제금까지 보내며 애국혼을 불태웠다.

멕시코시티.메리다=심상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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