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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 나빠 탈출, 3류 인생 벗어나려 독하게 살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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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호 04면

10월 10일은 북한 노동당의 창건일이다. 올해로 65주년을 맞았다. ‘꺾어지는 해’(5, 10년)마다 대대적으로 치러진 기념행사는 올해 특히 성대할 전망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셋째 아들 김정은의 권력 세습을 공식화한 만큼 체제의 건재함을 알리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공화국을 물려받게 된 후계자 김정은은 올해 스물여섯 살이다.

10·10 노동당 창건일에 보는 북한 노동당 입당 거부 당한 탈북자 이충국의 ‘코리안 드림’

16년 전인 1994년 역시 스물여섯 살의 한 북한 청년은 ‘조국’인 북한을 등지고 남한행을 택했다. 출신 성분 탓에 노동당 입당을 거부당하고 절망 끝에 선택한 길이었다. 서울에 정착한 그는 지금 ‘잘나가는’ 한의사다. 강남구 신사동 ‘민들레 한의원’ 이충국(42·사진) 원장이다.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 공식화로 떠들썩하던 지난달 30일 이 원장을 만났다.

그의 병원은 비만 치료와 쁘띠성형을 주요 진료과목으로 한다. ‘자본주의 1번지’에서 미용 시술을 하는 탈북 한의사는 낯선 조합이다. 인터뷰에 앞서 운을 뗐다. “강남 한복판에서 성공하셨네요”라고. 아직 북한 사투리 억양이 남은 말투로 그가 받아쳤다. “아이러니죠. 북한에서 못 먹던 애가 여기 와서 돈 받으면서 다이어트시키는 게 너무 웃기잖아요.”

-북한에선 어떻게 살았나.
“양강도 김형직군에서 나서 자랐다. 열세 살 때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나이 차가 큰 누나들은 공부하러 떠나고 시골에서 혼자 자랐다. 옆집 할머니가 챙겨줬지만 먹고사는 건 해결해 줄 수 없었다. 배고프면 옥수수도 훔쳐 먹고 요즘 말로 꽃제비 생활을 했다. 공부는 좀 해서 평양이과대학 생화학과에 들어갔는데 쫓겨났다. 평양의대에 유학 온 중국 여학생이랑 데이트하다 들킨 거다. 그러고는 군에 갔다.”

평양이과대학은 수학·생물·화학·물리 등 자연과학만 가르치는 엘리트 육성 특수 대학이다. 그는 군에서 운 좋게도 요직에 배치받았다. 인민무력부 핵방위국이었다.

-왜 탈북했나. 배고픔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직업군인을 하면서 평양에 남고 싶었다. 그런데 평양에 거주하려면 노동당 입당을 해야 한다. 그게 안 됐다. 어떻게 좀 해달라고 했더니 아버지 문건을 보여주더라. 아버지가 경남 울산 출신이라서 안 된다고 했다. 경상남도 울산군 농서면 호계리, 지금도 기억난다. 절망했다.”

제대를 1년 앞뒀을 때였다. 같은 처지인 사람의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이남 출신 아버지를 둔 군인이 입당이 안 돼 중국으로 갔다고 했다.

“탈북자들한테 제일 걸리는 건 가족이다. 난 부모님이 안 계시고 처자도 없고 누나들은 시집갔으니까 ‘뭐, 한 번 가보자’ 싶었다. 다시 양강도로 쫓겨가서 농사를 지어야 하나,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 내린 결정이었다.”

통행증 없이 “헌병에게 ‘와이로’해서 압록강까지 갔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 게 1993년 11월 10일이었다. 강을 헤엄쳐 백두산 아랫마을에 닿았다. 남의 집 지붕 아
래를 전전하며 숨어다니다 이듬해 3월 남한에 들어왔다.

“정보사에 6개월 있었고(탈북자 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은 1999년 설립됐다) 도움을 받아 수협에 들어갔다. 처음엔 고맙고 감사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염증을 느꼈다. 혈연·지연·학연이 다 관련된 게 보였다. 특히 연말에 망년회를 하면 나만 소외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지점장도 못 될 것 같고…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살 순 없었다. 혼자 스스로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의 울타리에선 어렵지 않나.”

-그래서 전문직인 한의사가 됐나.
“(남한에) 온 바엔 잘 살아야지. 부자가 되고 싶었고.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자 직업을 갖는 거 같았다. 처음 2년간 나를 관리한 형사의 아들이 의대생이었다. 그 친구한테 의사가 되겠다고 했더니 한의대를 가라고 하더라. 의대 공부는 너무 길고 병원 차리려면 부모가 부자거나 장인을 잘 만나야 한다고.”

이 원장은 1996년 경희대 한의대에 특례입학하고 2002년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다. 경기도 하남시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의원을 개업했다. 은행빚 내서 문은 열었지만 신통치 않았다.

“찾아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통증 환자였다. 이 분들은 살 때문에 아프다. 무릎을 아무리 치료해도 살을 안 빼주면 계속 반복된다. 그러다 보니 비만 치료를 하게 됐고, 입소문이 나 2년 전에 강남으로 병원을 옮겼다.”

-그때부터는 탄탄대로인가.
“강남에 한의사·의사는 많다. 은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도 있고, 장인·장모 잘 만난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런 사람들도 픽픽 쓰러지는데 우리는 잘 되고 있다. 예전엔 두 눈 부릅뜨고 나 스스로 이 운명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런 긴장도 많이 풀어졌다. 사람들과 교류도 많아지고 주류 사회에 들어왔다고도 생각한다. 전엔 탈북자란 말도 안 했는데, 강남 사람들은 탈북자라는 말에 더 신뢰를 갖는 것 같다.”

-언제쯤 완전히 남한 사회에 동화됐다고 느꼈나.
“한국 사람과 동질감을 느낀 건 10년쯤 됐을 때였다. 한국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튀지 않고… 그래도 아직 북한 말은 많이 나온다.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른 탈북자들 같은 서러움은 별로 안 느낀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수협 다니기 전에 관광호텔에서 일했다. 두 달 일하니까 사장이 이것저것 제하고 56만원을 줬다. 참 심했다. 탈북자는 외국인 노동자보다 못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3류 인생인 거다. 그런 선입견이 있는 걸 아니까 절대로 밥을 얻어먹지 않는 습관도 생겼다.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를 만나든 내가 밥을 산다. 어쨌든 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고 믿나.
“믿는다. 나는 운이 좋아서 경희대 나왔고 한의사가 됐다. 인정한다. 하지만 난 2배의 노력을 했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 하는 심정으로 살았다. 이 땅은 이미 빈부 차가 딱 벌어졌다. 탈북자들이 그 상대적 빈곤감에 절망하고 무너진다. 원래 여기서 살던 사람은 봐 왔으니까 상관없지만 탈북자들은 그걸 보면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거다. 하지만 은수저 안 물고 태어난 이상 탈북자들은 좀 더 독하게 살아야 한다. 겨울에 태어나서 겨울에 가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없나. 세상은 그렇게는 안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옛날엔 더 쉬웠을 거다. 하지만 예를 들면 우리 세대가 100억원짜리 건물을 올릴 수는 없어도 10억원짜리는 가능하다는 거다. ”

-다시 해외로 나가는 탈북자도 많다.
“말 통하는 이 나라에서 적응 못했는데 말도 안 통하는 데서 할 수 있을까. 미국·영국·캐나다까지 흘러간다고 성공할 수 있을까. 나이가 어리면 또 모르지만 서른 넘으면 언어부터 안 된다. 나도 스물여섯에 왔는데 북한 말을 끝까지 못 버린다. 그렇게 힘들게 왔는데, 얼어 죽지 않으려고 버틴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급작스러운 북한 체제 붕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통일세를 얘기했다.
“(통일세는) 내라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거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다. 다만 통일을 준비하면서 재원을 마련하는 건 중요하다고 본다. 옛날에 동독은 잘 살았고 서독은 굉장히 발전한 나라였는데 이질감이 있었다고 한다. 남북한은 더 심할 거다. 지금 탈북자들을 봐도 답답하고 가슴 아프다. 혹시라도 위화감을 느낄까 봐 탈북자들을 못 만나지만 나도 동병상련이다.”

인터뷰 중 그는 여러 번 “노력하면 된다”는 말을 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도 했다. “난 모든 욕망에 자물쇠를 채우고 살았다”는 말로 지난 16년을 회고했다.
“황영조 선수가 팬티만 있으면 되는 운동이라 마라톤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런데 여민지 선수도 환경은 어려운데 즐기면서 축구를 한다고 하더라. 탈북 1세대는 황영조 선수랑 비슷하다. 우리가 어떻게 즐기나. 남들이랑 똑같이 즐기면 갈 길이 뻔한데… 더 독하게 마음 먹어야지. 헬리콥터는 바람이 안 불어도 스스로 날개 돌려서 일어난다. 우리도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서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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