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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의 펜이 없었다면 워싱턴의 칼은 쓸모없었을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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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호 19면

페인은 훗날 기독교를 배척했지만 그가 퀘이커교도인 아버지로부터 배운 엄격한 개인주의, 인류애, 평화주의는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라는 경구에 토머스 페인(1737~1809)만큼 어울리는 역사적 인물은 흔치 않다. 페인은 문(文)이 무(武)보다 강할 뿐만 아니라 “칼의 힘은 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인생을 살았다.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이다. 페인이 『상식(Common Sense)』을 저술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지금도 영국의 일부이거나 훨씬 나중에 독립했을지도 모른다. 미국 초대 부통령이자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1735~1826년)는 “페인의 펜이 없었더라면 조지 워싱턴의 칼은 쓸모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6> 토머스 페인 『상식』

세계 민주 혁명의 전도사
페인은 미국 혁명뿐만 아니라 프랑스혁명과 영국의 급진주의적 민주화 운동에서도 맹활약해 ‘세계 혁명의 전도사(missionary of world revolution)’라고 불리게 된 국제적인 혁명가·선동가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자유주의자·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페미니스트·민주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를 사상적인 조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1776년 미국에서 『상식』을 출간하기까지 1737년 영국 노퍽 셋퍼드에서 태어난 페인의 인생은 30대 중반까지 실패의 연속이었다. 페인은 가업을 잇고자 아버지에게 코르셋 제작을 배우기도 하고 성공회 신부가 되려고 한 적도 있었으며, 세무 관리, 사략선(私掠船) 선원, 교사로도 근무했으나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두 번의 결혼도 실패했다. 페인은 가난 때문에 정식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지력이 뛰어났다. 자신이 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욀 수 있는 암기력을 자랑했으며 토론을 통해 상대방의 지식을 스폰지처럼 흡수했다. 그래서 존 로크의 저작을 읽지 않고도 그 골자를 파악하기도 했다.

『상식』의 영문판(The Modern Library Classics版)과 우리말로 번역된 『상식론』(범우사·박광순 옮김)의 표지.

그러던 그가 귀인을 만나 미국에서 기회를 잡게 된다. 런던에서 만난 벤저민 프랭클린이 페인을 높이 평가하고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준 것이다. 1774년 미국에 도착한 페인은 ‘펜실베이니아 매거진(Pennsylvania Magazine)’에서 편집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 미국과 식민지 모국 영국은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었다. 1775년 4월 19일에는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아직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의지가 없었다. 페인은 1776년 1월 10일 『상식』을 출간해 미국이 단지 영국의 폭정에 맞서는 게 아니라 독립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제가 ‘명백한 진실(Plain Truth)’이었던 『상식』의 주장은 당시만 해도 충격적이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이나 벤저민 프랭클린도 독립에 대해서 미온적이었다. 46쪽 분량의 소책자인 『상식』은 출간 3개월 만에 12만 부, 첫해에 50만 부가 팔렸다. 당시 미국 인구는 300만 명에 불과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상식』을 읽었다. 문맹자들을 위해서는 낭독회가 개최됐다. 독립전쟁이 본격화되자 페인은 종군 활동에 나섰고 『위기(The Crisis)』(1776∼1783년)라는 논설 시리즈를 간행해 “싸움이 격렬할수록 승리는 빛난다”라며 미국인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페인은 『상식』에서 군주제를 비판하고 공화제만이 미국이 갈 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기독교 신앙이 두터운 민심에 호소하고자 구약 성경을 인용해 군주제가 신의 뜻에 반하는 것임을 설파했으며, 특권층을 인정하는 영국의 군주·귀족 전제정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상식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상식』을 읽은 미국인들은 독립에 대한 모든 의구심이나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섬나라 영국이 대륙인 미국을 지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 미국은 영국인의 나라가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온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것, 영국에 복속된 상태에서는 유럽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며 미국이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국제무역에 전념할 수 없다는 것, 영국 수준의 해군력을 구비하는 것은 알고 보면 쉽다는 것, 영국이 미국을 통치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등 『상식』은 미국 독립의 불가피성과 독립으로 미국이 누릴 수 있는 이익에 대해 구구절절 미국인의 가슴에 와 닿는 말로 가득 찼다.

유럽으로 건너가 버크와 논쟁
1776년 7월 4일의 독립선언문은 『상식』에서 페인이 주장한 내용을 대부분 수용했다. 『상식』은 미국 독립을 촉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의 주요 문헌이 됐다. 어려운 철학을 들먹이거나 라틴어 문구를 인용하지 않는 페인의 쉬운 문체가 한몫했다.

자신이 ‘할 일이 없어진’ 미국을 뒤로 하고 1787년 4월 페인은 유럽으로 떠났다. 유럽에서 페인은 프랑스 혁명과 영국 민주화 운동에 휘말리게 된다. 영국 정치가·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1729~1797년)가 세계 보수주의의 바이블이 된 『프랑스 혁명론(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에서 프랑스 혁명을 비난하자 페인은 『인간의 권리(Rights of Men)』(1791년)로 반박했다. 『인간의 권리』는 영국 급진주의 운동의 핵심 문헌으로 떠오른다. 출간 2년 내에 『인간의 권리』는 『프랑스 혁명론』보다 3배 더 팔렸고, 출간 10년 내에는 30배 더 팔렸다고 전한다.

프랑스 명예시민이 된 페인은 1792년 프랑스 국민의회의 헌법 제정 의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반란 선동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떨어졌던 그다. 프랑스에서는 국왕 루이 16세의 사형에 반대해 1793년 12월 28일 투옥당했고, 1794년 11월 4일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과 프랑스 주재 미국 공사 제임스 먼로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옥중에서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의 제1부가 출판됐고 석방 후 제2부가 나왔다. 페인은 초월적인 신(神)의 존재를 믿는 이신론자(理神論者)로서 단지 기독교에 반대할 뿐이었으나 『이성의 시대』로 그는 무신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는 성경이 신의 말을 기록했다는 것을 부정했으며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부도덕하다고 주장했다. 페인은 그의 마지막 주요 저작인 『토지 분배의 정의(Agrarian Justice)』(1797년)에서 재산 소유의 불평등을 공격하고 최저 소득의 보장을 주장해 더욱 많은 적을 만들었다. 페인은 사회주의의 문턱에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마음이 곧 교회, 세계가 곧 조국
페인은 1802년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향했다. 그를 기다린 것은 독립전쟁 영웅에 대한 환대가 아니라 ‘무신론자’에게 가해지는 냉대와 비웃음과 증오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마침 ‘제2차 대각성 운동(Second Great Awakening)’으로 불리는 기독교 부흥 운동이 한창이었다. 미국은 페인의 이신론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음주로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가난에 시달렸지만 페인은 계속해서 특권과 기독교라는 종교적 제도와 종교적 미신을 공격했다.

페인은 1809년 뉴욕 시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노예 출신인 두 명의 흑인을 포함, 6명에 불과했다. “내 마음이 곧 내 교회다”라고 주장하기도 한 이신론자인 그가 묻힐 수 있는 교회는 없었다. 미국 혁명에 기여한 대가로 뉴욕 주정부가 준 뉴로셸 농장에 묻혔다. 10년 후 영국의 급진주의자 언론인인 윌리엄 코벳이 페인의 유해를 영국으로 가져갔다. 민주 혁명가에 걸맞은 성대한 기념식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후 그의 유골은 분실되고 말았다.

『뉴욕 시티즌(New York Citizen)』에 실린 부고 기사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약간의 선행과 많은 해악을 끼치면서 오래 살았다(He had lived long, did some good and much harm).” 이 평가가 사후 100여 년 동안 지속됐다. 그는 잊혀진 건국의 아버지였다.

페인이 시대를 앞서 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페인의 전기를 쓴 W E 우드워드는 “페인은 인간의 자유와 인류의 권리에 대한 그의 주장을 세계가 수용할 준비를 갖추기 한 세기 전에 태어났다”고 평가했다. 페인은 누진 소득세를 징수해 대중교육과 빈민구제, 노인연금, 실업구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고 『아메리카의 아프리카 노예제(African Slavery in America)』(1775년)에서는 노예무역을 비판하고 흑인에게 완전한 인권을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거의 평생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의 저술은 수십만 부씩 팔렸지만 인세를 받지 않았다. 그는 교각 없는 철교와 연기 안 나는 초 등을 발명한 발명가이기도 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신념 때문에 우정도 종종 틀어졌다. 조지 워싱턴은 페인의 저작물들을 병사들에게 읽혀 사기를 돋우기도 했으나 둘은 노예제 문제로 결별했다. 워싱턴 가문은 노예 소유주였던 것이다. 한편 나폴레옹은 베개 밑에 『인간의 권리』를 깔고 잠을 자고 “우주의 모든 도시에 금으로 만든 페인의 동상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열렬한 페인의 지지자였고 페인도 한때 나폴레옹에게 상당한 기대를 했으나 나폴레옹이 독재자의 길을 걷자 그를 ‘가장 완벽한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페인은 “자유가 없는 곳에 내 나라가 있다(Where liberty is not, there is my country)”라며 세계의 시민(the citizen of the world)’을 자처했다. 영국도 미국도 그의 조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라는 나라는 민족주의·제국주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 미국은 세계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었지만 동시에 세계 여러 나라 중 한 나라에 불과하기도 했다. 그가 ‘미국 혁명의 아버지’, ‘영국의 볼테르’로 복권되고 칭송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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