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의 현장] ‘목자 잃은 양’ 한국 펀드 투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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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돌아올 텐데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다름 아닌 펀드환매 얘기로, 요즘 증권사나 자산운용사 관계자들을 만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국내 투자자들의 펀드환매가 벌써 2년째다. 올 들어 환매된 주식형 펀드만 20조원에 육박한다. 펀드에서 돈을 빼는 동안 코스피지수는 1600대에서 1900대로 질주했다. 이제 와서 돈을 다시 넣기도 꺼림칙하다. 속이 쓰리지만 ‘내 능력과 판단이 부족했음이려니’ 하는 투자자가 대부분일 게다.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도 따지고 보면 투자자들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소리였다.

그러는 동안 외국인 투자자들은 잔뜩 배를 불렸다. 당분간 계속 그럴 판이다. 외국인들은 올 들어 15조원어치의 국내 주식을 순매수했다. 이들 자금 또한 대부분 펀드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다른 나라들도 펀드환매가 심각했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돈이 다시 들어왔고 올 들어서는 가속도가 붙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 증시는 꿀단지 같은 투자처다.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선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인도네시아나 태국 같은 신흥국까지 펀드투자 열기가 뜨거운데 왜 한국만 예외인지 말이다. 유독 한국의 투자자들만 어리석기 때문일까. 투자자들을 그렇게 만든 ‘양치기 소년들’은 없었는지 찾아보자.

먼저 마켓 리더들이다. 선진국 증시를 보면 투자자들이 낙담할 때나 들뜰 때나 중심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리더가 있다. 워런 버핏이나 짐 로저스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의 역할은 자신의 투자회사나 펀드에 투자한 사람들에 대한 응분의 서비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펀드 수수료를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다.

한국 상황은 어떤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종적을 감춘 마켓 리더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해외시장 개척 등 이유도 분분하다. “나를 믿고 따르라”더니 어떻게 된 것인지 투자자들은 어리둥절하다. 주된 펀드 판매 창구였던 증권사들은 요즘 온통 랩어카운트 타령이다. “펀드에 투자해서 언제 돈이 되겠나. 랩 상품으로 화끈한 수익을 올리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금융지주회사의 리더들도 마찬가지다. 토털 금융서비스를 표방하며 은행 창구에 펀드 판매를 독려했던 그들은 지금 나 몰라라 딴전만 피운다. 어떤 금융지주사는 내부 권력투쟁에 정신이 없고, 다른 금융지주사는 과거 경영진의 일이라고 발뺌한다. 이들도 랩 어카운트 쪽으로 눈을 돌린다. 은행 창구에서도 랩 상품을 팔도록 해 달라고 금융당국에 간청한다. 돈 되는 상품이니 시류에 편승해 팔고 보자는 심산일 게다.

모두가 고객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다. 증시가 꺾이면서 랩 상품에 큰 손실이 나면 이들은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이를 거두고 새 좌판을 벌일 것이다. 뜨내기 장사가 따로 없다.

정부 책임도 크다. 금융허브정책을 표방하고 자본시장통합법을 내놓으며 국제적 실력을 갖춘 투자회사를 육성하겠다더니 그 의지는 온데간데없다. 들리는 것이라곤 친서민금융의 구호뿐이다. 자통법 시행 이후 자본시장의 질서는 오히려 혼탁해졌다. 증권사와 자문사 등이 대거 신규 설립된 반면 정부가 의도했던 대형사 간 인수합병(M&A)은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고만고만한 회사들 간의 과당경쟁은 눈앞의 잇속에만 몰두케 하는 영업환경을 초래했다.

지금 한국의 펀드 투자자들은 ‘목자 잃은 양’의 처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운명을 개척하는 수밖에 없다. 과거의 아픔은 뒤로하고 미래로 눈을 돌려야 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지금 왜 한국 증시에 불꽃 베팅을 하고 있을지 꼼꼼히 따지고 또 따져보자.

김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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