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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In&Out 레저] 진도에선 푸른 겨울이 숨을 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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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 위로 걸린 진도대교를 넘자 들녘은 짙푸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물론 벌써 새싹이 움트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엄동설한을 견뎌낸 대파를 비롯해 배추며 봄동 등 월동작물들이 섬 전체를 그득 메우고 있다.

때론 해안선을 따라, 때론 산기슭을 파고들며 끊어질 듯 이어가는 겨울 작물들의 행렬이 대동강물도 아직 풀리지 않은 시기에 생경한 풍광을 지어낸다.

하여 겨울색에 지친 도시의 여행자들은 울돌목을 건너는 순간부터 알싸한 파 냄새와 함께 푸른 생명력을 호흡하게 된다.

진도=최현철 기자<chdck@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 진도는 겨울이 농번기

"진도는 겨울이 농번기랑께. 여자들이 허리 펼 시간이 없제." 지난 13일 진도를 찾은 기자에게 진도 문화유산 해설을 맡고 있는 허상무씨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바다 건너 해남 땅이 월동 배추 최대 생산지라면 진도는 겨울 대파 주산지. 전국 생산량의 21%가 진도산이다. 4월에 파종해 가을까지 생장을 거듭한 대파는 12월이 넘어서면서 수확에 들어간다. 설을 전후한 시기가 수확의 절정기. 섬이지만 땅이 기름지고 넓어 진도 사람들은 농사가 주요 산업이다. 예부터 제주의 식량은 진도에서 댔다는 말이 있을 정도. 그 중 절반이 겨울 대파와 월동 배추밭이니 겨울이 농번기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600만평에 이르는 너른 밭을 경작하는 것이 여자들의 몫이란다. 그럼 남자들은 뭘 하느냐는 질문에 허상무씨는 빙그레 웃으며 선뜻 답을 내놓지 않는다.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서일까. 농사일뿐만 아니다. 남성 중심 문화의 핵심인 상사(喪事)에도 진도에선 여자들의 역할이 중심적이다. 상여도 여자들이 메고, 상엿소리며 씻김굿을 하는 것도 여성이다. 진도아리랑과 강강술래 등 놀이문화를 만들고 지켜온 것도 여성들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고려말 원나라의 침입에 끝까지 항거한 삼별초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 막바지에 제주도로 탈출한 일부 세력을 제외하곤 삼별초 주력군이 진도에서 괴멸했다. 섬 남쪽 끝 남도석성을 비롯해 삼별초가 세운 임금 왕온의 묘소, 지도자 배중손 장군의 사당과 동상 등 진도엔 삼별초의 흔적이 곳곳에 녹아 있다. 몽고군은 반란을 도왔다는 이유로 진도의 남자 2만여명을 원나라로로 끌고갔다. 이후 조선 초기에도 숱한 왜구의 침입에 남자들이 죽어갔고 임진과 정유년의 전쟁은 남자들의 씨를 말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산한 세월을 어렵게 버텨온 여성들은 그 한스러운 삶을 문화로 승화시켰다.

*** 초분·돌무덤…살아있는 고유 문화

동중국해에서 한반도를 향해 올라온 물살은 진도에 도착하면서 서해와 남해로 갈라진다. 그래서 진도 주변엔 하루 종일 거센 물살이 휘감아 돈다. 섬을 돌아나가는 물살의 빠르기는 평균 10~14노트. 이렇게 거센 물살을 이용해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을 일궈냈다. 하지만 진도 사람들에게 거센 물살은 뭍과 섬을 갈라놓는 차단막일 뿐이다. 해남 땅이 지척이지만 대교가 놓이기 전 진도 사람들은 뭍에 나가는 것이 고역이었다. 육지와 교류가 뜸하다 보니 진도엔 고유의 문화가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의신면 신정마을 길가에서 만난 초분도 특이한 문화 중 하나다. 진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일단 산에 시신을 눕히고 그 위에 짚단을 쌓아 초분을 만든다. 대략 3년 정도 지나 뼈만 남으면 이를 수습해 영구 매장한다. 일종의 풍장 풍습인 셈. 초분은 해마다 짚단을 새로 쌓은 뒤 솔가지를 하나씩 꼽아 햇수를 표시한다. 보통 3년이면 이장하지만 신정마을 초분에는 솔가지가 네개였다. 묏자리가 마땅치 않아 시기를 놓친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귀찮은 짓을 잘 안 하려고 해서 초분 보기도 힘들어졌어." 상주 차승태씨는 사라져가는 전통이 아쉬운 듯 넋두리를 했다.

어린 아이나 결혼을 못 한 젊은이가 죽으면 정식으로 매장하지 않고 산속에 돌무덤을 만드는 것도 진도만의 독특한 문화다. 야산 자락의 돌무덤은 이제 보기 힘들어졌지만 산속에선 아직도 돌무덤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초상을 치른 뒤 상주들을 위로하는 굿의 일종인 다시래기 역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전통이다.

*** 구성진 우리네 소리의 고향

흔히 남도는 소리의 고향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소리에 대한 진도 사람들의 애착은 대단하다. 예전부터 이 고장 아낙네들은 남정네가 지나가면 소리를 청해 한 가락 제대로 뽑으면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물론 노래를 못 하는 길손은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 남도들노래.강강술래.북놀이.다시래기.만가 등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노래와 놀이가 진도엔 유독 많다. 특히 진도아리랑은 전국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대표적인 곡이다. 한스러운 가락에 유장미가 흐르는 다른 아리랑과 달리 진도아리랑은 유머와 재치가 넘치고 가락도 어깨를 들썩이게 흥겹다. 밭에서 일하면서, 빨래터에 모여 앉아 펼쳐놓는 수다와 신세타령이 그대로 노래가 된 것이 진도아리랑이기 때문이다. 때론 "연지분통 안 사중께 당신은 싫어요"라고 투정을 부리고, 때론 "일본 대판이 얼마나 좋아서 꽃과 같은 나를 두고 연락선을 탔느냐"며 눈물을 뿌리는 소박한 노래가 공식적으로 200여 수 전해진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곡은 900여 수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단다.

노래에 대한 애착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진도 민속예술단의 실력은 이미 국악계에서도 알아주는 수준. 이들은 1994년부터 매주 토요일 2시간의 상설공연을 하는데 이젠 주말에 진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필수코스가 됐을 정도다. 몇 해 전에는 삼별초를 주제로 한 민요 창극을 만들어 서울 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해부터는 아예 관광객들이 원하는 곳에서 소규모 공연을 펼치는 '찾아가는 예술단'을 만들었다. 세방리의 낙조나 운림산방의 고택을 배경으로 구성진 가락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진도말고 또 있을까. "이 나이 먹어서 뭘 바라겄소, 그냥 우리 진도아리랑을 알릴 수 있으면 그로 족하요." 남도잡가 명창으로 진도예술단을 지도하고 있는 강송대(65) 선생의 바람대로 진도엔 새로운 명물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 여행정보

서해안고속도로 끝인 목포에서 영암.금호 방조제를 차례로 건넌 다음 77번 국도를 타고가면 진도대교에 닿는다. 부산이나 여수 쪽에서 온다면 2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진도는 역사와 문화유적을 제외하고도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다. 특히 세방리 해안도로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전국 최고로 꼽힌다.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 사이의 2.8㎞ 바다가 갈라지는 희귀한 장면이 매년 서너 차례 연출된다.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 랑디가 현장을 목격하고 '모세의 기적'이라며 프랑스 신문에 소개한 뒤 세계적인 명승지가 됐다. 올해는 3월 10일과 5월 24일에 바닷길이 열릴 예정. 230여 부속 섬 중 관매8경을 품은 조도군도와 조선시대 유배지 접도가 가장 유명하다. 조도로 가는 배는 서남쪽 팽목항에서 출발한다. 진도는 남도소리와 함께 남종화의 화맥을 잇는 곳이다. 소치 허유 선생이 자리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미산 허형, 남농 허건과 증손자 허문까지 5대가 대를 이었다. 소치가 세운 운림산방은 옛 모습을 그대로 전하며 최근 남종화 명맥을 총체적으로 전시한 역사유물전시관을 산방 옆에 지었다. 진도의 대표 먹거리는 바지락회와 간재미.듬복국. 진도향토문화회관 근처 사랑방음식점(061-544-4117)이 유명하다. 숙소는 진도읍에 집중돼 있고 조도에도 두세개의 여관이 있다. 찾아가는 예술단 공연은 2~3일 전 군청 문화관광과(061-540-3045)에 신청하면 볼 수 있다. 정해진 공연료는 없지만 감사의 표시 정도를 하는 것이 관행. 다만 최소 20명 정도가 돼야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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