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킬 때의 달콤함, 삼킨 뒤의 씁쓸함, 이 남자의 사랑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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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적은 음악을 먼저 짓고 노랫말을 덧씌우는 순서로 곡 작업을 한다. 이번 신보에 대해 “이미 만들어 놓은 음악에 사랑에 관한 노랫말을 붙였더니 착착 붙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뮤직팜 제공]

대중음악에서 사랑이란 얄궂은 ‘클리셰(상투어)’다. 대중음악사 100년간 생산됐던 대개의 음악이 사랑을 노래한 것들이다. 해서 뮤지션들은 ‘사랑’이란 진부한 말 앞에 멈칫하곤 한다. 가수 이적(36)이 ‘사랑’이란 클리셰와의 지루한 싸움을 매듭지었다. 3년 반 만에 4집 앨범을 들고 돌아왔는데, 타이틀이 ‘사랑’이다. ‘사랑’이란 단출한 타이틀은 이번 앨범의 지향점을 또렷이 보여준다. 1번 트랙부터 10번 트랙까지 죄다 사랑 노래로 빼곡하다.

“앨범이 사랑 노래로만 채워지는 게 부담스럽긴 했어요. 수많은 사랑 노래들과 맞서는 것도 쉬운 건 아닐 테고…. 하지만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랑이란 진부한 주제와 한 번쯤은 정공법으로 승부를 펼칠 필요가 있겠다 싶었죠.”

하긴 줄기차게 사랑만 노래했는데도 조금도 진부하게 들리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가 치른 사랑이란 클리셰와의 한판 승부는 승리로 결판난 셈이다.

승리 요인을 꼽자면, 우선 음악의 힘이다. 길게는 2년 전부터 구상하고 가다듬었던 곡들로 앨범이 채워졌다. 그가 틈틈이 썼던 60곡 가운데 선발된 10곡이 담겼다. 사운드도 풍부해졌다. 지난 앨범이 주로 피아노와 기타로 밀고 갔다면, 이번엔 스트링·브라스·퍼커션 등 다채로운 악기 편성이 도드라진다. 그는 “소극장 편성이던 지난 앨범과 달리 악기 편성을 확대했고 곡 자체도 다양한 편곡으로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한데, 세련된 음악만으로 사랑의 진부함을 뛰어 넘기란 힘들었을 터. 그가 가멸차게 갈고 닦은 노랫말이 사운드를 뒷받침 했다. 사랑의 말들이 사랑의 멜로디 위에 포르르 내려앉은 모양새다. 이를테면 이번 앨범은 한 편의 연애소설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그대랑’)로 시작해 사랑의 상처(‘다툼’)를 더듬더니, 지난 사랑을 애도하는 노래(‘매듭’)로 문을 닫는다.

“계획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낸 건 아닌데 대략적인 서사는 분명히 있어요. 사랑을 처음 시작하는 느낌으로 문을 열어 사랑을 추억하는 노래로 문을 닫는 식이죠. 막연하나마 하나의 사랑 스토리가 담길 수 있기를 바랐던 건 사실이에요.”

사랑의 온갖 꼴이 담긴 탓에 ‘다행이다’ 풍의 간지러운 사랑 노래만 기대해선 곤란하다. 굳이 따지자면, 사랑의 설렘보다 사랑의 쓸쓸함 쪽으로 더 기울어진 앨범이다. 서른 여섯 남자에게 사랑이란 그저 쓸쓸한 어떤 표정인 걸까.

“결혼 전엔 ‘다행이다’를 쓰더니 결혼 후엔 왜 쓸쓸한 사랑 노래가 더 많이 나오느냐는 말도 들었어요. 하하. 주로 혼자 작업실에서 곡을 쓰다 보니 쓸쓸한 정서의 곡이 많이 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시절은 가을, 사랑의 설렘과 쓸쓸함이 마음을 샐그러뜨리는 계절이다. 하나 다행이다. 우리에겐 이적의 ‘사랑’이 있다. 사랑을 삼킬 때의 달콤함과 삼킨 뒤의 씁쓸함이 사랑스런 멜로디로 전해온다.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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