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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대가람’ 운문사 일구며 40년, 1700 제자를 기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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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그녀의 아버지는 스님이었다. 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의 류코쿠(龍谷)대학에서 유학했던 관응(觀應·1910~2004) 스님이다. 당시에는 대처승과 비구승이 구분 없이 수행을 하던 시절이었다. 선과 교학을 겸비했던 관응 스님은 환갑의 나이에도 여덟 평 남짓한 무문관(無門關·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방에서만 생활하는 수행처)에서 무려 6년을 수행한 일화로 유명하다.

그런 아버지가 딸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승려 노릇 하는 게 나쁘면 너한테 권하겠느냐?” 초등학교 교사였던 딸은 그 말을 듣고 곧장 출가했다. 아버지가 심은 불심(佛心)의 씨앗이 이미 그녀의 마음에서 싹이 텄던 걸까. 그 딸이 명성(明星·80) 스님이다. 23세에 출가, 40년간 청도 운문사를 대가람으로 일군 주역이다. 2004년부터 전국비구니회 회장을 맡고 있는 ‘비구니계의 수장’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동국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운문사 강사로 내려갔던 명성 스님은 “남을 가르치려면 우선 자신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채찍질하며 지금껏 1700여 명의 비구니 제자를 길러냈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 비구니사(史)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명성 스님은 청도 운문사를 대표적인 비구니 도량으로 일궈냈다. 명성 스님의 좌우명은 ‘즉사이진(卽事而眞-매사에 진실하게 살라)’이다. [불광출판사 제공]

27일 경북 청도 운문사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명성 스님의 책이 한꺼번에 세 권이나 나왔다. 평전 『후박꽃 향기』와 법문집 『즉사이진(卽事而眞-매사에 진실하게 살라)』, 그리고 그 동안 받았던 편지 글을 모은 『꽃의 웃음처럼 새의 눈물처럼』(이상 불광출판사)이다. 평전을 집필한 상좌 서광 스님은 “이 책의 주인공은 (명성) 스님이 아니고, 스님의 삶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성장과 깨달음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쓰여질 것”이라고 말했다.

명성 스님이 무작정 아버지의 뜻을 좇아 출가한 것만은 아니었다. 평전에 담긴 학창시절의 일화가 오히려 그의 ‘출가 이유’를 대변한다. 강릉여고에 다닐 때였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흰 도화지를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새가 날아간 뒤의 흔적을 그려보라”고 말했다. 명성 스님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백지를 그대로 제출했다. 아무런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왜 아무 것도 그리지 않았느냐?”고 묻는 선생님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허공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길 수가 없습니다.”

젊은 명성의 답에는 기지가 넘쳤다. 그의 말처럼 허공에는 흔적이 남지 않는다. 허공이 뭔가. 우리의 성품이 허공이고, 우리의 삶이 허공이다. 그렇게 비어있을 때 우리는 걸림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붓다는 “어떠한 상(相)도 붙들지 마라”고 말했다. 우리가 상(相)을 붙드는 순간, 허공에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허공에 새기는 흔적, 그게 바로 고통과 집착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무심코 던졌을지도 모르는 그의 대답에는 깊은 불교적 메아리가 녹아 있다.

그가 교편을 잡고 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출가 전이었던 명성은 강릉에서 탄허(呑虛·1013~83) 스님과 함께 피난을 갔다. “백설기를 만들어 가지고 나누어 먹으면서 피난을 갔어요. 그때 저는 21세였습니다. 동해안으로 걸어서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23세 때 입산을 했습니다.” 이후 명성 스님은 해인사 국일암으로 출가했다. 기도하고 있으면 빨치산의 총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보리쌀을 삶아 놓으면 밤에 훔쳐가기도 했다. 하루는 아버지인 관응 스님이 찾아왔다. 딸의 출가 생활이 궁금했던 거다. 관응 스님은 명성 스님에게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만 번 읽으라”고 말했다. 출가자의 초심을 잃지 말라는 당부였다. 명성 스님은 그걸 3000번 읽었다.

명성 스님이 동국대에 있을 때 지도교수는 대학교수로 남길 바랬다. 명성 스님은 그걸 뿌리치고 운문사 강사로 갔다. 비구니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명성 스님의 교육은 혁신적이었다. 풍금을 치며 노래를 가르치고, 영어와 일어도 가르쳤다. 참선과 수행만 중시하던 절집에서 풍금 치며 노래하는 일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명성 스님은 40여 동에 이르는 전각 등을 세워 운문사를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교육기관인 운문승가대학으로 일구었다. 올해로 명성 스님이 운문사로 내려간 지 꼬박 40년이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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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대한불교조계종운문사 회주
[現] 대한불교조계종전국비구니회 회장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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