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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유통기한이 여섯 달 … 포장에 숨은 과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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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어림잡아도 유통기한이 석 달은 된다는 이야긴데…’.

하지만 놀랄 건 없다. 스웨덴의 포장기술 업체인 ‘테트라팩’의 무균팩 포장기술이 담긴 덕분이다. 무균팩은 이 회사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여섯 겹의 특수 포장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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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알루미늄 포일·폴리에틸렌 등 여섯 장의 얇은 소재를 수 초 동안 고열 처리해 붙인 뒤 급속 냉각시켜 만들었다. 멸균 상태에서 무균팩으로 포장하면 첨가제·방부제 없이도 음료를 상온에서 최장 6개월 보관할 수 있다. 냉장고에 넣어두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이소영 테트라팩 이사는 “유럽·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무균팩을 음료 포장재로 써왔다”며 “오늘날 170여 개국 2600여 브랜드가 쓰는 포장재”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우유·두유 등 음료뿐 아니라 와인·막걸리 같은 주류에 이르기까지 무균팩 포장 제품이 속속 등장한다.

‘과학의 옷’입은 포장

이처럼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포장재에도 과학기술이 숨어 있다. 무균팩·레이저·캡슐·김장독…. 좀 더 오래 보관하고 사용자를 편하게 하는 포장을 위해 머리를 짜낸 결과다. 소비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식품·생활용품 포장재에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른바 ‘포장 2.0’이다.

CJ제일제당이 개발한 ‘하선정 통김치’ 포장재는 김장독의 ‘누름돌’ 원리를 활용했다. [CJ제일제당 제공]

동서식품의 커피믹스 포장은 첨단 레이저 기술을 활용했다. 2008년 도입한 ‘이지컷(easy cut)’ 방식의 포장재가 그것이다. 지그재그 모양의 커피믹스 끝부분을 세로로 뜯는 것이 아니라 커피믹스 중간의 절취선을 가로로 쉽게 뜯을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레이저로 땀선을 긋는 특허 기술이 도입됐다. 커피의 맛과 향은 최대한 보존하면서 포장을 쉽게 뜯을 수 있도록 하려고 다섯 겹은 그대로 두고 한 겹만 레이저로 얕은 ‘칼집’을 낸 것이다. 동서식품 기술연구소의 이경희 연구원은 “종전처럼 세로로 찢었을 때 내용물이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잘못 뜯어지는 문제점을 해결해 보려고 했다”며 “힘을 약간만 들여도 포장을 가뿐하게 뜯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네스프레소는 커피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캡슐’형 포장재를 활용했다. 커피 원두를 인체에 무해한 알루미늄 소재로 만든 캡슐 용기로 진공 포장한 것이다. 일반 원두가 공기에 접촉한 뒤 2주 정도 지나면 고유의 맛과 향이 사라지는 데 비해 캡슐에 담긴 원두는 맛과 향을 1년 이상 유지할 수 있다.

CJ제일제당의 즉석밥 ‘햇반’의 용기는 특수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 세 겹으로 만든 포장재 가운데에 산소를 차단할 수 있는 소재를 넣었다. 여기에 쌀을 담은 다음 무균 상태의 공간에서 질소를 채워 포장한다. 방부제를 넣지 않고도 밥을 상온에서 9개월 동안 보존할 수 있다. 섭씨 100도 이상의 고온에서도 견딜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 회사의 ‘하선정 통김치’ 뚜껑 포장은 김장독의 ‘누름돌’ 원리를 원용했다. 김치의 아삭아삭한 맛을 유지하려고 뚜껑에 울퉁불퉁한 모양의 누름판을 붙인 것이다. 뚜껑을 덮으면 누름판이 김치를 눌러 국물에 잠기도록 했다. 울퉁불퉁한 모양은 국물이 새지 않으면서 사이사이로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다. CJ제일제당의 차규환 포장개발센터장은 “김장독에 담긴 김치 위에 깨끗이 씻은 돌을 올려 둔 우리 선조의 지혜를 빌렸다”고 설명했다.

‘편리함’에서 ‘친환경’ 으로

애경의 겔형 세제 ‘리큐’는 거꾸로 세워 쓰는 용기다. 세제를 짜는 부분이 용기 밑바닥에 있다. 이런 경우 내용물이 밑으로 내려와 빨리 짤 수 있다. 하지만 내부로 공기가 통하지 않아 무리해서 짜다 보면 용기가 잘 찌그러진다. 거꾸로 세워놓았기 때문에 내용물이 새기 쉽다는 것도 단점으로 지적된다. 하지만 리큐는 공기가 쉽게 드나들면서 내용물은 새지 않도록 뚜껑을 밸브 구조로 만들었다. 이 회사 구규우 디자인센터장은 “용기 내부 압력을 스스로 조절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눌러 짜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세제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쉽게 짜 쓸 수 있어 절약도 된다.

LG생활건강의 스킨케어 브랜드 ‘비욘드 에코 엔젤’은 바이오매스 플라스틱으로 포장한다. 이 플라스틱은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신소재로 어린이가 용기를 입으로 빨아도 안전하다는 설명이다. 재활용이 쉽고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생분해된다.

김기섭 포장연구팀장은 “제조 과정에서 석유화학 성분으로 만든 플라스틱보다 t당 943㎏의 이산화탄소(CO₂)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패키징기술센터의 박상희 선임연구원은 “포장을 보는 소비자의 눈높이가 달라졌다. 보기 좋거나 튼튼하다고 다 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포장이 얇고 가벼우면서도 기능성·친환경성을 강화한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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