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보수의 지형이 바뀐다] 상. 누가 왜 나서는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보수 지식인 사회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학계.종교계.교육계.법조계에서 의료계에 이르기까지 범(汎)보수진영 지식인들이 잇따라 단체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의 '386' 운동권 출신과 온건보수 인사들은 "보수를 확 바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겠다"며 '뉴 라이트(New Right)'운동을 들고 나왔다. 지난 3일엔 헌법체제 수호, 한.미동맹 강화 등을 주장하는 각계 인사 200여명이 '자유지식인선언그룹'을 발족시켰다. '실용적 개혁'을 표방한 '헌법포럼'과 중도 성향의 제3의 변호사 단체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 모임'도 관심을 끌고 있다.

보수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은 진보 성향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결성되던 80년대 후반을 연상시킨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20여년 동안 진보세력이 줄곧 세력을 확장해온 데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지식인 사회가 좌우의 양극단으로 치닫는 분열상을 반성하고 중간지점을 찾아 수렴하기 시작한 조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보수 운동에 나선 지식인들은 '생산성을 외면하는 좌파'는 물론 종래의 '부도덕한 우파'도 극복하겠다는 입장이다. '좌파의 무능과 우파의 부패' 둘 다 비판 대상인 셈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제도권에 진입한 좌파들이 많은 이를 '실망'시킨 것도 보수 측에 힘을 실어주었다.

'뉴 라이트'운동 그룹에는 과거 학생운동권에서 반공.반(反)김정일로 전환한 386과 온건보수 시민운동 인사가 다수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단기간에 국민의 시선을 끈 데는 운동권 출신이 포함됐다는 상징성이 큰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신지호 '자유주의 연대'대표(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와 최홍재 전 한총련 조국통일위원회 정책실장(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홍진표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정책실장 등.

신 대표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해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강조하던 'PD(민중민주)'운동권 출신이다. 과거 'NL(민족해방)'로 불리던 주사(주체사상)파 출신 386도 있다. 반(反)김정일 운동으로 전환해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만든 한기홍.김영환씨가 대표적이다. 김씨는 80년대에 '주사파의 교과서'로 대접받던 '강철서신'의 필자로 유명하다.

지난해 11월 발족한 '자유주의연대'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자유'를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과거 남한의 군부독재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북한의 인권유린과 가부장적 권력질서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기존 보수와 진보 사이의 자유주의적인 공간을 보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이들과 가장 먼저 힘을 합친 조직은 온건보수적 시민운동 세력이었다. 뉴 라이트 운동의 임시회장을 맡고 있는 김진홍 두레교회 목사가 대표적이다. 김 목사는 서경석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사회책임'이라는 기독교계 중도 보수단체를 이끌고 있다.

김성기 변호사.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등 보수 원로들이 만든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도 뉴 라이트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남승희 명지전문대 교수 등은 교사.학부모가 참여하는 제3의 교육단체인 '바른 교육권 실천운동'을 올 6월 만들어 뉴 라이트 운동에 합류할 예정이다. 의사들의 단체 '의료와 사회포럼'(공동대표 이형복)도 뉴 라이트의 일원.

'자유지식인선언그룹'은 뉴 라이트 그룹보다 더 철저하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한다. 이 같은 기조에서 북한 김정일 체제에 대해 특히 비판적이다. 지난 3일 '대한민국의 자유.헌법.정통성 수호를 위한 지식인 선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발기인 대표인 김상철 변호사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친북 사상이 만연하고 있는데도 우리 지식인이 침묵하고 있는 게 문제다. 국제사회가 김정일의 폭정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도 한국사회는 김정일 체제가 앞으로 상당기간 간다는 것을 전제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자유지식인선언그룹은 스스로에 대해 "뉴 라이트와는 다른 정통 보수"(최광 한국외국어대 교수)라고 선을 긋는다. 앞으로 보수 운동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면서 수시로 포럼을 개최하고 사회적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예정이다.

그러나 자유지식인선언그룹은 아직 종전의 '극우'와 차별화할 새로운 이념을 내놓지는 못한 단계다. 이념적 기초가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기는 뉴 라이트 운동그룹도 마찬가지다.

'뉴 라이트 싱크넷'에 관여하고 있는 전상인 한림대(사회학) 교수는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한 학자는 "기존의 보수와 진보 모두 서열.집단주의, 과잉 민족주의, 친미와 반미의 분열, 국가주의, 멸공과 통일의 대립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진보 진영에서는 뉴 라이트나 자유지식인그룹에 대해 "세계 패권을 지향하는 미국의 신보수주의(네오콘)의 한국 버전"이라고 혹평하는 시각이 많다.

뉴 라이트와 자유지식인그룹이 우선 넘어야 할 산은 "권력을 겨냥한 또 다른 형태의 정치운동일 것"이라는 일부의 시선이다. 심지어 "다음 대선이 다가오면 한나라당 후원세력이 될 것"이라는 '오해'까지 나오고 있다. 북한인권, 한.미동맹, 시장경제 등 주요 의제가 너무 무거워 감각적인 성향이 강한 젊은 세대에 다가가기 어렵다는 점도 고민이다.

뉴 라이트 입장에서는 자신들보다 더 우익인 자유지식인그룹과의 차별화가 과제다. 뉴 라이트 운동에 참여한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우리 어젠다에 동의하는 중심 축이 옛 보수에서 젊은 층으로 얼마나 옮겨가느냐에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학자는 "뉴 라이트 관련 행사나 모임을 마련하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기존 보수세력들"이라며 "고통스럽더라도 기존의 보수와 전선(戰線)을 확고하게 긋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정명진 기자

*** 바로잡습니다

◆ 2월 11일자 8면 '집중 분석, 보수의 지형이 바뀐다'(상) 기사 중 뉴 라이트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최홍재씨는 전대협 의장이 아니라 한총련 조국통일위원회 정책실장을 지냈기에 바로잡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