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자신의 편향을 알고 부족함을 채워가는 작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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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08면

지식은 실천을 위한 준비라고 했다. 그 실천의 목표는 ‘인격의 성숙’이다. 사회적 참여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래서 성실(誠實) 다음에 ‘기질 바로잡기(矯氣質)’ 장이 있게 되었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율곡의 성학집요 <15> 교치기질(矯治氣質)-성질 뜯어고치기

주자는 친구 여조겸(呂祖謙·1137~81)의 사례를 들었다. “소싯적 그는 성질이 거칠어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을 엎었다. 그러다 병을 앓으며 논어 한 책을 뒤적이다가 ‘스스로에겐 엄격하고 남의 허물은 크게 탓하지 말라’는 소리에 홀연 깨달아 생각이 일시에 평온해졌다. 그 후로는 화를 터뜨린 적이 없다. 그의 기질은 그렇게 변화되었다.”

기질이란 ‘사물을 대하는 태도,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즈음 말로 심리학적·도덕적 의미에서의 ‘성격’에 해당한다.

1. 드센 기질은 누르고 위축된 기질은 펴라
자극에 대한 반응의 양상은 천차만별이다. 빠르고 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둔하고 느린 사람도 있다. 이 ‘속도’만 가지고는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 없다. “억센(剛) 기질은 과단성 있고 엄격하나, 과도한 자만에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약점이 있다. 이에 비해 부드러운 성격은 동정적이고 수용적인 것이 장점이나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며, 무원칙하기 쉬운 폐단이 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고, 자신감이 없고 존재가 약한 사람들은 위축되어 있다(沈潛者, 沈深潛退, 不及中者也, 高明者, 高亢明爽, 過乎中者也).

드센 기질은 누르고 위축된 기질은 펴야 한다. 그것을 스스로 리마인드시키기 위해 선비들은 “허리에 부드러운 사슴 가죽이나 팽팽한 활줄을 차기도” 한다. 이 훈련이 노리는 것은 상황이 요구하는 바의 최적의 합리성, 즉 중(中)에 서기 위함이다.

둘 가운데 고르라면 차라리 ‘드센’ 기질이 더 낫다. 가령 자로는 공자를 겁박할 정도로 사나웠지만 잘못을 깨닫고는 누구보다 헌신적인 자질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유약한 기질은 그러나 ‘떨치고 일어나기’ 어렵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공부란 자신의 기질이 갖고 있는 ‘편향’을 알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작업이다. 각자 기질이 다르므로 흡사 의사의 처방처럼 그 교정도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유교는 모든 사람이 어떤 상황에나 따라야 할 보편적 규범을 제시하지 않는다. 영원의 준칙이라는 ‘이(理)’는 퇴계의 언급대로 “언제 어디에나 있으되, 그것은 상황에 따른 적절성, 즉 시중(時中)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늘 다른 얼굴로 온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2. 仁은 성취 대상 아닌 돌아가야 할 고향
놀랄지 모르겠는데, 인간의 몸은 상황에 따른 반응의 적절성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학습의 과정이나 외부의 강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체 내의 본성’으로서 자기 속에 존재하고 있다. 다만 내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그리고 무엇인가가 그 알려짐을 방해하고 있다. 이 논법을 납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주자학 이해에 가장 큰 곤혹이 이것이다.

안연이 인(仁)을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 즉 “자신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감”이라고 정의했다. 주자학은 여기 인(仁)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즉 인(仁)이란 ‘성취’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고향(禮是自家本有底)’이라고 말했던 것이다(아, 우리의 다산 정약용이 이 독법을 너무 싫어한 나머지 독자적 유교 해석을 열었다는 점을 귀띔만 해 두고 넘어간다). 그 고향의 풍경 속에는 공감과 배려(仁)뿐만 아니라 정의감(義), 균형감과 판단력(智), 그리고 적절한 태도(禮)가 들어 있다.

문제는 사적 관심과 의지가 인간을 이 본래의 고향으로부터 추방시켰고, 인간은 어둠 속에서, 차단된 벽에 절망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니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극기공부(克己工夫), 자신을 넘어서려는, 니체의 외침을 빌리면 초인(超人)의 훈련이 필요하다.

3. 귀가 얇으면 바른 길을 놓친다
예(禮)가 아니라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 예는 과장하자면 허리를 굽히는 각도, 예식장의 폐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극기복례란 요컨대 바깥의 영향력에 흔들리지 않고, 내적 충동에 휘둘리지 않고, 사물이 요구하는 바 위에 서 있기 위한 훈련이다. 1) ‘볼 때’ 조심해야 한다. “앞에서 춤추는 사물들에게 혼을 빼주기 쉬우니(蔽交於前, 其中則遷).” 2) ‘들을 때’ 조심해야 한다. “귀가 얇아 유혹에 빠지면 바른 길을 놓칠 것이니(知誘物化, 遂亡其正)” 3)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한다. “허덕대는 소리,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그쳐야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될 것이기에(發禁躁妄, 內斯靜專).” 그리고 4) 사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면’ 위태로우니, 다만 사물이 보여주는 길을 그저 따라갈 뿐.(順理則裕, 從欲惟危).

이 사물(四勿)의 훈련이 익어가면 사물에 달리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어두운 ‘기질’은 밝아지고 약한 기질은 강해지며, 탐욕스러운 기질은 청렴하게 되고, 잔인한 성질은 자애롭게 변한다. 이것이 학문의 효과다.”

이 효과는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 중용이 가리키는 대로 학습(博學), 질문(審問), 성찰(愼思), 이해(明辨), 그리고 실천(篤行)의 먼길을 밟아야 한다. 율곡은 주저앉으려는 사람들을 이렇게 일으켜 세운다.

“이 훈련은 세간의 기예들과 마찬가지다. 타고 나면서 익히고 나온 사람은 없다. 음악을 한답시고 아이들이 처음 줄을 튕기고 소리를 지를 때, 다들 귀를 닫고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다 연습이 깊어지면 점차 음을 갖추다가 고르고 맑은 소리를 내고, 급기야는 신비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기도 한다. 이 경지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가해진 노력, 그리고 그것들이 쌓이고 익어간 결과다. 모든 기예가 다 그렇다. 학문이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도 이와 다를 바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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