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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예보하면 교통은 뚫린다, 운전자들과 치밀한 심리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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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04면

혼잡캘린더는 2008년과 2009년 추석 연휴기간의 고속도로 구간별 정체 길이, 운행 속도, 교통량에다 다가올 추석연휴 기간 예상 교통량 데이터를 종합 분석해 만든 예측자료다. [한국도로공사 제공]

한국도로공사 교통예보팀장인 남궁성(45·사진) 박사는 2008년 9월 14일 추석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 오전 남궁 박사는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서울톨게이트 옆에 있는 도공 교통센터 기자실에서 귀경 교통정보를 공개했다.

명절 교통정보 틀려야 마음 편한 도로공사 교통예보팀

“오늘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고속도로 정체가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 시간대에 귀경을 피하는 것이 좋다. 정체 시간을 고려하면 오후 3~5시 이후에 출발하는 것이 좋다.”

그는 연휴(12~15일)가 시작되기 전날부터 귀향길 예보를 1시간 단위로 하면서 ‘지금 출발하면 부산까지 10시간이 걸린다’는 식의 정보를 줬다. 그 이전까지 단순히 막히는 상황이나 도착자에게 물어서 확인한 소요시간을 알리는 정도에 그쳤다.

남궁 박사의 실험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뒀다. 전국 주요 고속도로 구간의 귀성(경) 소요시간은 2007년 추석 때보다 단축된 것이다. 특히 귀경 시간은 2~4시간이 줄었다. 당시 추석연휴 고속도로 전 구간 이용차량이 하루 평균 365만 대였다. 전년(328만 대)에 비해 11.2% 증가한 수치였다. 특히 추석 당일 고속도로 교통량은 역대 최대인 422만 대였다. 그럼에도 교통량 분산효과가 나타난 것이었다.

지난 설(2월 14일)에도 교통량이 414만 대나 됐지만 극심한 정체는 없었다.
이런 현상은 교통예보를 하는 도공과 운전자들의 심리게임 결과다. 도로가 막힌다는 정보를 주면 출발시각을 늦추고 반대 정보를 주면 빨리 한다. 그에 따라 교통량이 급변하는 것이다. 도공 교통예보팀은 설이나 추석 명절 때마다 1000만 대(국도·지방도 이용차량 포함)에 육박하는 귀성차량의 운전자와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인다. 그들 사이에서는 ‘(예보가) 틀려야 산다’는 교통 예보의 목표는 정확한 미래 상황을 맞히는 게 아니라 교통량 분산이라서다. 오는 21일부터 시작되는 올해 추석 연휴도 마찬가지다.

영동대교 막힌다는 방송 15분 후 뻥 뚫려
“2008년 추석은 교통 예보의 원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교통정보 전달이 아니라 판단정보까지 제공했다는 점에서죠. 사실 그 전까지 그렇게 안 했거든요. 만약 그때 예보가 틀렸다면 모든 비난을 내가 감수해야 했던 모험이었어요. 예보관은 한번 신뢰를 잃으면 끝장이니까. 결과적으로 우리 판단이 맞았습니다. 명절 당일 극심한 정체가 사라지고 교통 분산효과가 제대로 나타난 기념비적 날이 됐죠. 그날 이후로 대한민국 교통전문가들이 어쩌지 못했던 숙제를 푼 겁니다. 그간 교통정보가 틀리는 것에 대해 가져 왔던 죄책감과 압박감에서도 벗어났고요. ”

지난 9일 동탄시 도로교통연구원에서 만난 남궁 박사는 자신이 확신을 갖고 예보를 강행한 이유도 설명했다. 과거 10년치 교통량과 패턴을 분석해 보니 명절 당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귀경 인파가 몰려 극심한 정체가 빚어진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때만은 누가, 어떤 정보를 줘도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변함이 없었다. 지금도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아마도 제사를 빨리 지내고 서둘러 귀경하려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명절 교통예보에서 서울~대전 간 예상 소요시간은 상징성이 크다. 운전자들은 목적지가 그보다 멀어도 그 시간을 기준으로 출발 시각을 결정한다. 서울~대전 간 소요시간이 3시간50분이냐, 4시간이 넘어가느냐에 따라 고속도로 진입 교통량은 크게 달라진다. 불과 10분 차이지만 4시간이 넘어가면 사람들은 대개 출발하려고 쌌던 보따리를 풀고 주저앉는다. 그래서 실제 소요 시간이 3시간대임을 알면서도 4~5시간이 걸린다고 예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교통량을 이상적인 수준으로 맞춰나가면 누이(예보관) 좋고 매부(운전자)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남궁 박사의 임무는 명절 때 교통예보로 교통량을 시간적·공간적으로 분산시켜 지체와 정체를 완화하는 것이다. 그는 교통전문가로 이뤄진 7명의 교통예보팀원을 지휘, 먼저 전국의 교통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예측한다. 이어 어느 지역의 정체가 더 심해질 수 있는지 찾아낸다. 그러곤 가장 바람직한 교통 흐름 상황을 설정하고 차량 운전자들이 그 상황에 맞춰 가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남궁 박사팀은 고속도로 차량 진입량, 목적지까지의 예상소요시간, 차량 정체 길이 등을 1시간 간격으로 체크한다.

“현재의 교통상황 정보를 준다고 해도 사람들이 궁금한 건 자신이 곧 맞닥뜨릴 가까운 미래의 교통상황이거든요. 이 때문에 모든 교통정보는 미래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겁니다. 교통정보는 틀려야 맞는다는 역설적인 얘기가 왜 성립하느냐면 말이죠~. 만약 교통예보대로 미래의 교통상황이 펼쳐진다면 어느 누구도 그 정보를 받고 자신의 의사결정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 교통예보를 듣고 다른 길로 갈까 고심하다 출발이 늦어지기도 할 거고, 망설이다가 지금 가야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어요. 미래상황이 바뀌는 겁니다. 1990년 교통방송국 개국일에 ‘지금 영동대교가 막힙니다’는 방송이 나가자마자 거기는 15분 만에 뻥 뚫리고 대신 잠실대교가 꽉 막히는 사태가 벌어진 일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추석 아침, 대부분 가정이 차례를 지내느라 고속도로에 차량이 전혀 없지만 그 순간에도 교통예보팀은 ‘지금 부산에서 출발하면 몇 시간이 걸린다’는 정보를 내보낸다. 그래서 교통예보는 과거의 교통 흐름을 모르면 할 수가 없다. 어떤 전략을 쓸지 몰라서다. 올해 추석 연휴기간, 남궁 박사는 18일부터 9일간 매일 근무한다. 직원들은 돌아가며 근무하지만 속속들이 잘 아는 책임자가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다.

기상예보는 비 온다고 하면 맞아야 한다. 그래야 대비한다. 하지만 교통 예보는 안 막힌다고 하면 금세 막힌다. 운전자들의 과도반응 때문이다.

도공이 교통예보관을 둔 건 2008년 2월 설 때부터였다. 그 전해인 2007년 9월 추석 연휴 때 겪은 위기상황이 계기였다. 당시 5일 연휴의 마지막 날 정체가 극심했다. 차가 경부고속도로 청원휴게소에 들어갔다 나오는 데만 5~6시간이 걸렸다. 이전 3~4일에 걸쳐 내려갔던 차량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서였다. 전남 보성에서 서울까지는 19시간이 걸렸다. 도공에 비난이 쏟아졌고, 궁여지책으로 도로교통연구원으로 일하던 교통공학박사 출신인 남궁 박사를 그 자리에 발령냈다. “교통공학 박사가 있어도 교통대란은 어쩌지 못한다”는 말이라도 하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그는 책상머리 연구원에서 현장에서의 교통 통제 책임을 갑자기 맡게 됐지만 그해 설부터 귀성 시 출발지 기준 소요시간을 예상해 발표하는 등 과감한 시도를 시작했다.

이유 없이 길 막히는 건 ‘팬텀 보틀넥’ 탓
남궁 박사에게 2009년 1월 24일 설 때의 기억은 깊이 남아있다.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안성휴게소에서 버스 한 대가 차선을 점령하면서 교통 대란이 일어났다. 국도는 마비됐고 도공 직원들이 나가 우회하라고 했지만 차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성분기점으로 제설차가 들어가 눈을 치우려면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올라오는 차량의 통행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도 경부고속도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 어려워서였다. 경부선보다 상황이 나았던 서해안 고속도로 쪽만 해도 차량 3000대의 고립이 예상됐지만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차량은 줄지 않았다. 남궁 박사는 그때 상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기자실에 ‘강설 및 극심한 정체로 소요시간 예보를 잠정 중단합니다’라는 글을 종이에 써서 벽에 붙였다. 기자들은 이 내용을 보도했고, 이후 운전자들이 차를 돌렸다고 한다. 이어 경부고속도로가 두 시간여 동안 차단됐고 제설차가 투입됐다. 눈을 치우고 난 뒤 예보는 재개됐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개통 40년 이래 초유의 사태였다”고 말했다. 그는 “교통센터에 교통 관련 데이터를 벽에 붙여 놓고 과거는 어땠고 미래는 어떨까를 체크하면서 교통정보의 발표수위를 조절했었다”며 “최종 판단과정에선 데이터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관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밝혔다.

어느 특정 구간에서의 정체는 왜 일어나는 걸까. 남궁 박사는 “그건 ‘팬텀 보틀넥(유령과 같이 나타나는 병목현상)’이라고 하는 현상이다. 개미는 앞과 뒤의 간격을 정확히 맞추며 이동한다. 하지만 운전자는 앞차와의 거리를 줄였다 늘렸다 하며 운행한다. 그러다 앞차가 급정거하면 뒤차는 앞차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세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연쇄 반응으로 인해 맨 뒤편 차량은 정지할 수밖에 없다. 이는 출퇴근 시간이나 명절 때엔 더 심하다.”

요즘 명절 때 고속도로가 잘 안 막히는 이유에 대해 남궁 박사는 “도로가 늘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교통 정보에 기울이는 관심도와 스마트폰 등을 이용한 정보 수집력, 정보 순응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남궁 박사는 언젠가 꼭 하고 싶은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했다. 명절 때 전 국민의 고속도로 정체 시간을 1시간씩 줄여주는 일이다.

“전국 생방송에 나가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운전자들의 고속도로 진입을 조정하는 겁니다. 부산권 출발하고 경남권은 대기, 강원권은 휴대전화 뒷자리가 홀수인 운전자는 지금 출발하되 짝수는 기다렸다가 신호를 주면 출발하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전체 고속도로 교통상황을 훤히 볼 수가 있어서 가능합니다. 교통계에도 일기예보계의 김동완 전 통보관같이 국민적 신뢰를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틀리면 날씨가 이상하다고 했지 그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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