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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안과 바깥 <8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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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금은 벌써 오래 전에 방파제와 부두 건설이 되어 지형 자체가 변해버렸지만 예전에는 선창에서 서부두 쪽으로 개천처럼 바닷물이 들어오고 축대가 쌓여 있었다. 가운데에는 중국 피란민들이 타고 들어와서 버려졌다는 낡은 정크선이 반쯤 기울어진 채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제주도의 민물은 거대한 정수시설인 한라산의 화산석으로 스며든 다음에 모두 해변에서 지하수로 솟아나기 마련이어서 아침부터 물 긷는 여자들과 설거지나 빨래를 하는 여자들이 해변의 민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모여 있었다. 어느 물 긷는 소녀가 너무 예뻐서 성진이와 나는 두고두고 얘기했다.

전국이 다 그랬지만 지방으로 내려올수록 전후의 모습이 그대로 방치된 채로 남아 있었고 끼니를 찾아 밥술을 먹는 이들은 도심지의 월급쟁이나 장사꾼들 정도였다. 농부들도 제 땅 가진 이들 외에는 소작농이 많아서 광길이네 시골에서도 매해 봄이면 부황이 드는 농가가 많더라고 했다. 제주도에는 전쟁 내려와서 아직 나가지 못한 피란민도 많았고 불과 몇 년 전까지 한라산에서 공비 토벌이 있었다고 했다. 나중에 팔십년 대에 가서야 나는 4.3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를 보게 되고 목격담도 듣게 되면서, 전쟁 전에 이미 봉기와 양민학살의 참상이 있었고 그것은 뭍에서의 전쟁이 끝나던 오십삼년 무렵까지 계속 되었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관음정에서 만난 어느 여고생이다. 우리는 한라산에 오르겠다고 고집하는 광길이 녀석 때문에 관음사의 정자 있는 곳까지 하루종일 걸어갔다. 한낮에 메마르고 황량한 허허벌판의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가는데 나는 그게 그냥 평지인 줄로만 알았더니 해발 천미터가 넘는 곳이었다. 도중에 하도 목이 말라서 수박 밭 옆을 지나다가 전쟁 때처럼 원두막 아래 가마니에 앉아 다리 쉼을 하면서 우리는 수박 한 개를 사먹었다. 그것이 잘못 되었던지 아니면 더위를 먹었는지 나는 배탈이 나서 관음정에 이르러서는 아예 뻗어버리고 말았다. 광길이는 그렇다 치고 꾀쟁이인 성진이까지 웬일로 다른 사람들을 따라 백록담을 보련다고 올라갔고, 금방 어두컴컴해지더니 안개인지 비인지 모를 는개가 짙게 뿌려댔다. 나는 맥을 놓고 정자의 흙투성이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누군가 는개 속에서 규칙적인 걸음걸이로 나타나 정자를 향하여 걸어왔다. 처음에는 남자인 줄 알았는데 키도 나보다 더 크고 어깨까지 벌어진 사람이 등에 배낭을 지고 군용 야전점퍼에 달린 모자를 머리 위로 깊숙이 내려쓰고 정자에 들어섰다. 그는 방금 산에서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혼자 뭘해요?

목소리가 여자여서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일행을 기다린다고 말했더니 그녀가 어디 아프냐고 되물었고 나는 배탈이 난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는 물밖에 좋은 게 없으니 많이 마시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우리보다 겨우 한 학년 위였다.

-서울서 큰 일 치렀지요?

-예, 친구가 죽었어요. 총 맞고….

-이담에 역사 책에 나온다는 건 다 헛소리예요. 사람들이 기억하려고 노력을 해야지요.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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