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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들'처럼 영화평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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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과거는 영화의 좋은 먹잇감이다. 상상으로만 떠올릴 수 있는 과거사가 눈앞에 재현되는 것만으로도 관객을 흥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제작자가 특정 과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사회적 논의를 끌어낼 수 있어 과거는 매력적인 영화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만화경처럼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는 제3 공화국은 영화인들로 봐서는 매력 덩어리임에 틀림없다.

*** 영화 한 편으로 역사 평가 하겠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정착한 텔레비전에서는 제3공화국이라는 과거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작업을 행해 왔다. 하지만 극영화 중심의 영화계에서는 제3공화국을 픽션화해야 하는 부담 때문인지 그 매력 덩어리를 다룰 별다른 지혜를 발휘하지 못했다. 제3공화국에 걸쳐 있는 관객들의 무수한 상상력과 기억들을 뛰어넘을 자신이 없었던 것도 제작을 주저케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최근에 착수된 제3공화국에 관한 픽션 영화들은 감춰졌지만 놀랄 만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 시대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수법을 펼치고 있다. 많은 관객을 모았던 '실미도'가 바로 그 예가 아닌가 싶다.

지금과는 너무나 다름을 강조하는 영화계의 제3공화국 다루기 수법을 2월 개봉을 앞둔 '그때 그 사람들'에서도 채용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지금과는 너무도 다르게 사는 그때 그 사람들을 영화는 다루고 있다. 지금은 놀림감이 될 만큼 터무니없지만 그것조차 엄숙하리만큼 진지하게 부여잡고 산 그때 그 사람들의 분위기를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의 사람들에게 전하려 한다. 영화는 그때 그 분위기를 역사적 근거가 아닌 작가적 상상력으로 몇 가지 모티프로 뭉뚱그려 펼친다.

으레 그렇듯, 이미 역사를 살았던 실존인물을 다루는 것처럼 소문난 이 영화 역시 개봉되기도 전에 많은 형태의 평가들을 이끌어 냈다. "5000년 가난 종식이 누구의 덕이더냐, 표현의 자유 남발하는 영화사는 각성하라"는 격문을 적은 1인 시위형 평가도 시사회장 앞에서 벌어졌다. 정치적 의도가 담긴 정치성 짙은 영화라는 야당 국회의원의 영화평도 있었다. 그 시대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의 평도 전해진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씨의 법에 기댄 평가였다. 박씨는 지난 10일 서울중앙지법에 죽은 자의 명예를 훼손한다며 영화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하며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도 소송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입장을 표시했다. 영화가 개봉되기 직전인 2월 1일께 법원이 신청에 대한 결정을 내릴 예정이라 한다.

박지만씨의 법률적 영화평은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극영화가 갖는 사회성, 영화적 장치, 관객의 수용성, 상업영화의 마케팅 기법 등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오늘날 관객들은 영화 한 편으로 과거를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영화 안의 내용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또한 상업 영화들이 펼치는 마케팅 기법들이 영화 안에 오롯이 녹아 있음도 눈치 챌 공산이 크다. 하지만 박씨의 법률적 영화평에는 이런 고려가 없어 보인다.

*** 표현의 자유에 대한 존중 없어

가장 큰 문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존경심이 빠져 있는 것이다. 아직도 그때 그 사람들처럼 영화를 평하려 한다. 지금 박씨를 비롯한 유족들이 펼쳐야 할 영화평은 이 영화를 계기로 더 많은 역사적 해석이 펼쳐지고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격려다. 이 영화의 작용.반작용으로 새로운 해석의 영화들도 등장해야 한다는 기대를 담은 생산적 영화평을 내놓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때 그 사람들은 갔지만 지금 우리는 좀 더 지혜롭게 대화하고, 세상을 펼쳐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시사회장 앞에서 벌인 1인 시위형 영화평이 그래서 더 살가워 보였다.

원용진 서강대 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