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비싼 값 제시한 중국 백기사 있다” 석유공사 압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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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10면

“우리 비즈니스 가치는 한국석유공사(KNOC)의 평가보다 높다.”
한국석유공사가 적대적 인수합병(M&A)하겠다고 나선 영국 다나페트롤리엄의 설립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톰 크로스(49·사진)의 말이다. 중앙SUNDAY는 한국 기업 최초로 석유공사가 추진하는 적대적 인수합병(M&A) 과정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그를 전화 인터뷰했다. 그는 자기 회사 가치가 아주 높다는 점을 되풀이 강조했다. 가격만 맞으면 M&A에 동의할 수 있다는 듯이 들릴 정도였다.

한국석유공사의 적대적 M&A 공격받는 英 다나페트롤리엄 CEO 톰 크로스

-석유공사가 제시한 가격이 불만인가.
“CEO의 의무는 가능한 한 많은 프리미엄을 확보해 주주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KNOC가 제시한 주당 18파운드(3만3000원)는 다나의 자산 가치를 모두 반영하지 않았다.”

-올 6월 30일 주가보다 59% 높은 가격이지 않은가.
“우리는 유전을 추가로 인수하려고 하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엔 적자였지만 올해엔 흑자를 냈다. 이런 주주 가치가 KNOC 제안 가격에 반영되지 않았다.”
크로스는 지난주 말인 27일 상반기 실적을 앞당겨 발표했다. 순이익이 4860만 달러(580억원)라는 사실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엔 550만 달러 정도 손해를 봤다. 마치 ‘이렇게 실적이 좋아진 회사를 그런 싼 값에 인수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크로스는 또 영국 북해 유전을 추가로 사들이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상반기 실적을 공개할 때 함께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크로스는 캐나다 석유회사인 선코(Suncor)에 3억7200만 달러를 주고 북해 유전을 사들이는 협상이 진행 중임을 감추지 않았다.

-가격만 맞으면 M&A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우리 경영진이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많은 프리미엄을 받아내 주주의 이익을 보상하는 것뿐이다.”

-주요 주주들이 석유공사가 제시한 가격을 받아들였다.
“KNOC가 주주 과반수인 51% 지지를 확보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많은 주주가 그 가격에 동의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주들에게 9월 8일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날이 오면 다나 경영진은 주주들에게 어떤 제안을 하겠는가.
“(껄껄 웃으며) 한국 미디어에 우리 카드를 보여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국 M&A 규정에 따르면 사려는 쪽은 적대적 M&A를 선언하고 가격을 제시한 뒤 일정 기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 규정 때문에 다나 경영진은 9월 8일까지 시간을 벌었다. 일반적으로 M&A 대상 기업의 경영진은 그 기간에 온갖 방어작전을 준비한다.

-회계법인의 자산부채 실사를 받아 공개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경영진은 주주들이 회사의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해 판단할 수 있도록 도울 의무가 있다. 영국 왕실의 면허를 받은 회계사(공인회계사)들이 자산과 부채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석유공사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할 수 있는 제3의 기업은 있는가.
“모두 9월 8일에 공개하겠다. 우리 회사는 매력적이다. 메이저 석유회사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 기업이다. 중국 석유기업 등 대형 석유회사들이 관심을 보였다.”

-관심을 보인 중국 회사를 공개할 수 있는가. 시노펙인가.
“말할 수 없다.”
그는 백기사(White Knight) 작전을 얘기했다. 공격받은 경영진이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회사를 끌어들여 적대적 M&A 공세를 펼치는 쪽을 퇴치하는 방어 작전이다. 크로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석유공사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중국 회사가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면서 덤비면 석유공사는 치고받으며 인수전을 벌일지 아니면 인수 제안을 접을지 결정해야 한다.

크로스의 주장에 대해 석유공사는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뭐라 말할 수 없다”며 “다나의 가치를 다시 평가해야 할 요건이 새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인수 제안가를 올릴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크로스가 말한 대로 중국계 백기사가 나타나면 석유공사는 ‘아닥스의 굴욕’을 다시 겪을 수도 있다. 석유공사는 지난해 6월 스위스 석유회사인 아닥스페트롤리엄 인수에 나섰다. 석유공사는 86억 달러를 제시했지만 막판에 시노펙이 92억 달러를 부르며 뛰어들었다. 아닥스는 결국 시노펙의 품에 안겼다.
런던 금융 중심지인 더시티(The City) 쪽은 크로스의 희망대로 백기사가 나타날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계인 도이체방크의 전문가 말을 빌려 “주당 18파운드 이상을 제시하며 크로스 구원에 나설 대형 석유회사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보도했다. 크로스가 올 상반기 경영실적을 서둘러 발표하고 유전 인수협상을 영국 언론에 흘리는 것 자체가 아직 백기사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회사 가치를 최대한 알려 다른 인수자의 관심을 끌어보기 위한 전략이라는 얘기다.

-석유공사가 언제 적대적 M&A를 공식 통보했는가.
“금요일인 8월 20일 오전 7시쯤이었다. KNOC 쪽의 통고를 받은 회사 간부가 아침에 전화를 해왔다. (웃으며) 모닝콜이었다.”

-예상은 했는가.
“올해 초부터 나는 ‘우리 회사가 쇼핑 리스트(인수 대상)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회사는 대형 석유회사들에 더욱 매력적으로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석유공사가 아시아 기업이라서 반대한다는 말도 있다.
“터무니없는 말이다. 나는 경영자이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주주가치와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할 뿐이다.”

석유공사는 다나 공격에 나서면서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투자은행인 메릴린치를 대리인으로 선정했다. 올 6월 크로스 등 다나 경영진과 접촉해 인수 의사를 타진했다. 물밑 협상이었다. 양쪽의 대화는 한 달 정도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크로스는 “KNOC가 우리 회사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양쪽의 협상은 깨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저돌적인 강영원 KNOC 사장이 전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강 사장이 적대적 M&A를 결정하자 메릴린치 등은 이른바 ‘거리청소’에 나섰다. 거리청소는 M&A 세계의 은어다. 주요 주주들과 접촉해 지분을 확보하는 작업을 말한다. 석유공사 쪽은 적대적 M&A 공식 선언 하루 전인
이달 19일 다나의 최대 주주인 슈로더 등의 지지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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