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탄압 시달린 대한제국 황실 후손들 적통문제 둘러싸고 갈등

중앙일보

입력 2010.08.28 00:53

업데이트 2010.08.3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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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 6월 서울 방배경찰서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하 종약원)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됐다. 종약원은 조선왕조의 제사를 주관하는 전주 이씨 종친을 대표하는 단체다. 고소인은 왕실의 또 다른 후손인 이초남(67)씨였다. 자신이 의친왕의 둘째 아들 고(故) 이우(1912~1945)씨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이씨는 “2005년 이후 종약원 측이 ‘이초남은 가짜’라고 언론 등에 발표해 고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종약원 차원에서 나를 부정하는 것은 내가 황손의 적통성을 문제 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100년(8월 29일)을 앞두고 왕가에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송사(訟事)에 휘말린 걸까.

논란은 2005년부터 불거졌다. 고종의 네 자녀(순종·의친왕·영친왕·덕혜옹주) 중 순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영친왕의 아들 이구(1931~2005)씨가 일본의 한 호텔에서 타계했다. 황손이었던 그가 자손이 없이 숨지자 종약원은 의친왕의 아홉 번째 아들의 장남인 이원(48)씨를 양자로 들여 황손을 잇게 했다. 종약원은 “이구씨가 황손 지정 문제를 종약원에 일임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초남씨는 “이구 황손이 후계 문제를 종약원에 일임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의친왕의 아들이자 이초남씨의 숙부인 이석(70)씨도 같은 주장을 했다.


두 사람은 2006년 자신들이 만든 대한제국황족회 이름으로 의친왕의 장녀인 이해원(91)씨를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녀’로 옹립했다. 종약원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조선에 두 명의 황손이 등장한 셈이었다. 이석씨의 논거는 “영친왕보다는 의친왕의 자손에게 왕가의 적통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영친왕의 비(妃)인 이방자 여사가 일본 왕족이었다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방자 여사는 고종이 승하한 뒤 영친왕과 결혼했다. 일제는 조선 왕가와 일본 왕족을 결혼시켜 조선의 식민지화를 공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쓰시마 도주의 후손과 결혼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후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실의 적통성 문제는 끊임없는 논란이 됐다. 20년 이상 조선의 마지막 왕실을 연구한 서울교대 안천(역사학) 교수는 “적통성 문제의 본질은 일본이 의도적으로 조선 왕가를 해체해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는 조선 여성과 약혼한 영친왕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시키고 파혼을 종용했다”고 설명했다. 영친왕이 이방자 여사와 결혼하면서 일본의 왕족이자 일본군 중장 신분이 됐다는 것이다. 영친왕은 태평양 전쟁 때 조선인 징병을 위해 ‘황국신민의 병사가 되라’는 글을 낭독하기도 했다. 안 교수는 “적통성 논란 자체가 일제의 잔재”라고 설명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종약원은 “현재의 황손의 적통성에는 문제가 없다. 적통성 논란을 만드는 것보다 100년간 잃어버린 왕가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종약원 등에 따르면 항일투쟁에 나섰던 의친왕의 경우 12남9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들 중 호적에 등재된 사람은 2명뿐이다. 그 자녀들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덕혜옹주는 해방 후에도 15년 넘게 일본의 한 병원에 있었다. 옹주의 존재는 1950년대 들어서야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종약원 이목춘 부이사장은 “500년 이상 지속된 조선 왕실은 우리가 보존해야 할 귀한 유산”이라며 “일제에 의해 흐트러진 왕가의 역사를 복원하고 지키는 것이 경술국치의 치욕을 극복하는 길이기에 더 이상의 법적 논란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정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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