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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에 부러진 ‘안네의 밤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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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다락방 밖으로 파란 하늘과 밤나무가 보인다. 밤나무 가지에 맺힌 빗방울이 반짝이고 바람을 따라 미끄러지듯 나는 갈매기와 새들도 은빛으로 빛난다. 이들이 존재하는 한 나는 살아남아 이들을 보게 될 것이고 이들이 있는 한 나는 불행할 수 없다.”(1944년 2월 2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집’ 앞에 서 있던 밤나무가 23일(현지시간) 폭풍우로 부러졌다. 안네는 은신 생활을 하는 동안 이 나무를 보며 희망을 얻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암스테르담 로이터=뉴시스]

『안네의 일기』의 한 대목이다.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 숨어 지내다 1944년 8월 체포돼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16세를 일기로 숨졌다. 25개월간의 은신 생활 동안 밤나무는 소녀에게 희망을 주는 친구였다. ‘안네 프랑크 밤나무’로 알려진 이 나무가 폭풍우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고 AP통신 등이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마트예 모스타트 안네 프랑크 기념관 대변인은 “23일 오후 비바람이 세차게 불던 중 ‘우지끈’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니 나무가 부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이 밤나무의 수령은 150살이 넘는다. 2007년 곰팡이와 이끼로 몸통의 절반이 썩어 쓰러질 경우 주변 건물을 덮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아 베어질 뻔했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이 “밤나무는 안네 프랑크와 유대인 박해 역사의 한 부분”이라며 반발해 1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2008년 회생의 기회를 얻었다. 그 뒤 설립된 ‘안네 프랑크 밤나무 지원을 위한 재단(SAFTF)’이 나무의 관리를 맡았다. 재단은 5만 유로(약 7500만원)를 들여 철제 버팀대를 설치하고 나무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전문가들은 밤나무가 5~15년은 버틸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나무는 불과 2년 만에 쓰러졌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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