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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179) 50여 년간 정체 감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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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옌바오항(가운데 안경 쓴 사람). 왼쪽에서 둘째 소년이 전 중공 중앙 서기처 서기 겸 통전부 부장 옌밍푸. 김명호 제공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독일의 소련 침공, 소련 홍군의 만주 진입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무명의 중국인이 있었다는 얘기는 하나의 전설이었다. 1991년 봄, 54년 만에 자유를 획득한 장쉐량(張學良)이 뉴욕에 도착하자 온 중화권이 들썩거렸다. 아무리 사소한 말이나 행동도 그가 하면 뉴스가 됐다. 하루는 심부름이라도 하겠다며 옆에 붙어 다니던 전 동북(東北)대학 총장과 조카에게 옌바오항을 거론하며 “자녀들이 뭘 하는지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연일 옌바오항의 이름이 지면을 장식했다.

장쉐량에게 문안인사 보낼 사람을 물색하던 중공 중앙은 항일 명장 뤼정차오(呂正操1905~2009)가 옛 상관을 만나겠다며 뉴욕행을 자청하자 옌바오항의 아들 옌밍푸(閻明復)를 합류시켰다. 전세기가 베이징을 출발하기 직전 국가주석 양상쿤(楊尙昆)이 공항으로 달려왔다. 옌밍푸의 귀를 잡아당기더니 그것도 모자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너 내 말 똑바로 들어라. 장쉐량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절대 말하지 마라. 상심해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큰일난다.”

양상쿤의 걱정은 기우였다. 장쉐량은 옌바오항이 문혁 시절 감옥에서 사망한 것을 알고 있었다. 옌밍푸에게 “네 아버지는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장제스는 우리 두 사람을 그렇게 죽이려 했지만 쑹메이링이 반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며 ‘옌바오항기금회(閻寶航基金會’ 설립을 제의했다. 휘호(揮毫)는 물론이고 자금까지 출연했다. 옌밍푸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귀국하자 마자 부친의 지난 세월을 추적했다.

95년 11월 1일 베이징의 러시아대사관은 꼭두새벽부터 분주했다. 이날 중국 주재 러시아 대사는 옐친을 대신해 ‘반 파시스트 전쟁 승리 50주년 기념훈장’과 증서를 27년 전 세상을 떠난 옌바오항과 그가 이끌던 공작조에 수여했다. 옌바오항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숙한 사람들조차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다. “항일전쟁 시절 성경책을 옆에 끼고 장제스 부부가 가는 곳마다 모습을 보이던 국민당 고관 옌바오항이 마르크시스트였다니.” 말 같지 않은 소리였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소련이 훈장을 줄 리가 없었다.

저우언라이와 리커눙 외에는 50여 년간 그 누구도 몰랐던 ‘홍색 특수공작원’ 옌바오항의 행적이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옌바오항은 동북의 빈농 출신이었다. 12세 때부터 산에 올라가 남의 집 돼지를 키웠다(만주는 돼지를 방목한다). 틈만 나면 사숙에 달려가 창밖에서 수업을 들으며 글을 깨우쳤다. 추운 가을날 해질 무렵 사숙 선생이 나오더니 소년 옌바오항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공부는 너 같은 애가 하는 거”라며 학비를 받지 않았다.

사숙 선생은 1913년 옌바오항이 동북의 최고 학부였던 펑톈(奉天)사범학교에 수석 합격하자 “나는 수재를 제자로 뒀던 사람이다. 마적질을 할지언정 더 이상 미련한 것들과 씨름하기 싫다”며 사숙을 걷어치웠다.

1918년 사범학교를 졸업한 옌바오항은 극빈자 자녀를 위한 무료학교를 설립했다. 선양(瀋陽)의 YMCA에서 처음 만난 동북 왕(王) 장쭤린(張作霖)의 장남 장쉐량과 동북군 참모장 궈쑹링(郭松齡)의 후원을 받았다. 특히 펑톈여자사범학당을 졸업한 궈의 젊은 부인 한수슈(韓淑秀)는 매일 학교에 나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7년 만에 6개의 분교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장쉐량의 모금과 한수슈의 덕이었다.

1925년 겨울, 동북에 쿠데타가 발생했다. 모반의 주역이 궈쑹링으로 밝혀지자 옌바오항은 외국인 친구 집으로 피신했다. 낯선 사람이 찾아와 한수슈가 보냈다며 영문 성경(HOLY BIBLE)을 건네 줬다. 사진도 한 장 들어 있었다. 장쭤린은 궈쑹링과 한수슈를 총살시키고 3일간 광장에 폭시(曝尸)했다. 연루자들의 명단은 찢어버렸다.

목숨을 건진 옌바오항은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웠다. 통곡과 술 외에는 아무것도 내키지 않았다. 장쉐량이 찾아와 “남편은 나라를 위해 죽지만 나는 남편을 위해 죽는다. 아무 유감도 없다”는 한수슈의 유언을 전하며 영국 유학을 권했다.

에든버러 대학까지 가는 동안 옌바오항은 한수슈의 마지막 선물을 깡그리 외어버렸다. 한의 숨결을 대하듯 하루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영문 성경이 후일 ‘홍색 특공’ 옌바오항의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암호 책으로 둔갑할 줄은 본인도 몰랐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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