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노무현 당선자에 바란다: 정치 개혁이 우선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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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개혁과 변화에 대한 열망. 이것이 노무현 당선자를 선택한 국민들의 선택코드다. 그런 만큼 새 정부의 과제는 개혁의 추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혁에는 함정이 존재한다. 과거 정부들의 예에서 보듯이 개혁의 사명을 무겁게 느끼면 느낄수록 개혁 강박증에 빠져 개혁의 주체이어야 할 국민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런 강박증은 곧 개혁조급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개혁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됨에 따라 개혁피로와 개혁냉소를 초래하기도 한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가 국민들의 변함없는 지지 속에서 우리 사회의 불합리함을 고쳐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혁의 전략을 잘 짜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국민 스스로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개혁의 칼을 당선자 본인이 휘두르기보다는 국민의 의사가 왜곡되지 않고 반영될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역대 정부가 개혁의 기치를 내세웠지만 민심의 이반만 초래한 것은 대통령 본인이 개혁을 선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졌기 때문이다. 소수의 관료나 학자의 머리에 의존한 개혁은 국민들의 공감대도 얻어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조세감면법이 65년에 제정된 이래 1백차례 이상 개정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제도의 불안정성만 초래하는 악순환을 낳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울러 개혁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데 전략적 고려가 필요하다. 노무현 당선자를 지지한 집단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개혁이 시작돼서는 안된다. 국민의 대다수가 찬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클린턴 행정부의 개혁이 낙태의 허용, 동성연애자의 군 입대 허용과 같은 국민의 의견이 양분돼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에 따라 국민 다수가 등을 돌리게 되고, 그에 따라 클린턴 행정부 최대 개혁과제였던 의료보험개혁을 실시할 힘을 상실했음은 물론 중간선거에서도 참패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개혁은 정치권만 제외하고는 모든 국민이 찬성하는 정치개혁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정치개혁은 국민의사의 올바른 투입구조를 만든다는 점에서 다음 개혁을 위한 중요한 준비작업이 되며,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투표기록을 완전 공개할 경우 어느 국회의원도 반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좋은 출발점이 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동안 한국 정치를 억눌러 왔던 3김식 카르텔 정치구조를 깨고 공정한 경쟁과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고양시키는 제도개혁을 하는 것이다. 3김식 정치는 한편으로는 지역감정에 기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비용 정치를 극복한다는 명분 아래 제도적으로 공정한 경쟁과 국민의 정치참여를 막음으로써 3김의 과점적인 지배력을 유지해온 것에 그 핵심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입법례를 찾기 어려운 시민·사회단체의 선거과정 참여를 배제한 선거법으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정당에 대한 막대한 국고보조를 3김이 나눠 가지도록 한 정치자금법으로 군소정당이 공정하게 경쟁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밀실공천과 공천장사가 횡행해도 눈감고 있는 정당법으로, 그리고 여당의 전횡을 견제한다는 명분 아래 총무회담 중심으로 운영하도록 만든 국회법으로 3김이 사실상의 입법거부권을 지니는 대신 의원들은 모두 3김의 거수기로 전락시켰다.

3김만 합의하면 하루에도 수십건의 법안이 통과되는 반면 3김 중 누구 하나만 거부해도 국회가 문을 열지 못하는 국가기관의 사유화 현상이 벌어져왔던 것이다. 그 결과 3김은 법 위에 존재하게 돼 정치권은 법보다는 3김의 의중을 더 중시하게 되고, 이는 사회 전반적인 법 경시로 이어지게 됐다.

노무현 당선자의 승리 그 자체가 한국정치를 억눌러왔던 3김식 카르텔 정치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역사의 수레바퀴가 되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경쟁과 참여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나아가 3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카리스마에 의한 개혁이 아니라 제도에 의한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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