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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쭉쭉 찢은 묵은지의 알싸한 맛, 밥 한 공기 추가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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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호 10면

어디 입맛 확 돌게 짭짤하고 개운한 반찬 없나? 여름 내내 끼니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가끔 궂은 날에는 뜨끈한 수제비가 먹고 싶기도 하지만 땀 뻘뻘 흘리는 날엔 찬밥 한 덩이에 짭짤하고 개운한 반찬 한두 가지면 족하다 싶다. 고혈압을 위해 짠 반찬을 먹지 말라느니 하는 상식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어쩌랴. 밥맛은 없고 그것이 입에서 당기니 먹는 수밖에 없다. “결국 소금의 절대량이 문제이니 조금씩 먹지, 뭐” “이뇨를 돕는 차나 과일을 많이 먹어 나트륨을 많이 배출하면 되지, 뭐” 이런 마음을 먹고 결국 짭짤한 반찬을 선택한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23> 물에 씻은 묵은 김치와 짭짤한 강된장찌개

어릴 적 짭짤하고 개운한 반찬이 먹고 싶은 날에는 엄마가 묵은 김치를 꺼내왔다. 11월 말 김장 때 담근 김치가 무려 8, 9개월이나 어느 구석에 있다가 나왔는지 참으로 궁금하지만, 하여튼 그 긴 시간 동안 폭 삭은 맛으로 밥상에 올랐다. 요즘은 김치냉장고가 있어 한여름까지 묵은 김치를 갖고 있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집에 작은 냉장고 하나만으로도 감지덕지했던 예전에는 한여름 묵은 김치는 귀물이었다. 김장은 이미 3월이 되면 군내가 나고 물러져 먹을 수가 없다. 그러니 한여름까지 간간이 묵은 김치의 깊은맛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아예 여름용 묵은 김치를 따로 담갔다. 담글 때부터 배추가 덜 무르도록 신경을 쓰는 것이다. 비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간이고 다른 하나는 해물과 젓갈이다.

여름까지 먹을 김치는 일단 간이 강해야 한다. 즉 다른 김치에 비해 짜게 담가야 그럭저럭 여름까지 버틸 수 있다. 그래서 오로지 김치만으로 버티던 옛날 주부들은, 겨울에 먹을 김장부터 3, 4월, 심지어 7월과 8월에 먹을 김장까지 따로따로 간을 해서 담그기도 했다.

비법은 늦게 먹을 것일수록 소금을 한 주먹씩 더 넣는 것이었다. 대신 여름 김치는 해물과 젓갈은 적게 넣어야 한다. 젓갈과 생 해물은 김치를 빨리 무르게 하고 폭 시었을 때 군내도 더 나게 만든다. 즉 여름에 먹을 김장은 소금만으로 담근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해야 덜 무른다.

좀 더 바란다면, 아예 좀 질긴 배추로 담그면 더 좋다. 프로 농사꾼들이 지은 통통하게 알밴 연한 배추와 달리, 아마추어들이 배추를 키우면 속이 엉성하고 질긴 배추가 생산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을 구할 수 있으면 몇 포기라도 짜게 김장을 담가놓아 볼 만하다. 이런 김치는 거의 일 년을 꼬박 묵어도 배추가 무르지 않는다.

묵은 김치를 꺼내는 날이면 집안 전체가 김치 군내로 진동을 했다. 엄마는 그 김치 포기를 들고 양념을 탈탈 털어냈다. 군내가 심하게 나는 경우는 물에 살짝 헹구기도 했다. 묵은 김치의 속살은 노랬다. 엄마가 칼을 대려고 하면 나는 펄펄 뛰었다. 그건 손으로 쭉쭉 찢어 밥 한 숟가락 위에 척 얹어 먹어야 제맛이라고. 엄마는 그게 그건데 뭘 그러냐고 하시면서도, ‘쪼끄만 게, 맛은 알아가지고!’ 하는 표정으로 웃으셨다.
이렇게 꺼내 먹은 묵은 김치는 그 수명이 딱 한 끼뿐이다. 마치 피라미드 속 미라가 바깥 공기를 만나면 급격히 삭아버리듯, 꺼내 놓은 묵은 김치는 잘 싸서 냉장고에 넣어두어도 한두 시간만 지나도 맛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그래도 아까워할 필요가 없다. 강된장찌개를 끓이면 되니까.

강된장찌개는 짭짤하고 개운한, 입맛 없는 여름의 대표적인 밥도둑이다. 갓 지은 따끈한 밥과 먹어도, 다 식은 보리밥 한 덩이와 비벼 먹어도 너무나 훌륭하게 잘 어울린다. 강된장찌개는 말이 찌개지 사실 비빔소스에 더 가까울 정도의 것이다. 더운 국물을 떠먹지 않고 뚝배기에서 바글바글 끓는 뻑뻑한 국물과 건더기를 밥에 척 얹어 쓱쓱 비벼먹는 맛으로 먹는다.

강된장찌개는 그저 된장을 많이 넣고 짜게 끓인다는 것일 뿐, 집집마다 넣는 재료가 다 다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료는 짠지 건더기나 묵은 김치 우거지다. 여름에 꺼내먹고 남은 묵은 김치, 혹은 먹고 남은 짠지 건더기, 여름 김치 찌꺼기 등이 들어가야 제맛이 나는 것이다.

된장을 많이 풀고, 멸치를 넉넉히 넣은 후 집에 있는 야채들을 적당히 넣어 끓인다. 뻑뻑한 맛을 위해서는 끓기 전에 찹쌀가루나 밀가루를 좀 풀어 넣으면 된다.다른 된장찌개와 다른 점은 또 있다. 마늘과 풋고추를 매우 많이 넣어야 한다. 마늘은 다른 된장찌개의 네댓 배, 풋고추는 곱게 다져서 열 배 이상은 넣어야 맛이 난다. 뻑뻑한 찌개의 맛은 이 많은 재료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찌개 속에 끓이면 대부분 멀컹멀컹해지는 여름 야채들 속에서, 김치 건더기는 비교적 쫀득하게 간이 짭짤하게 밴 건더기의 맛을 낸다. 젓가락으로 건져 먹어도 맛있고 밥에 비벼 먹어도 이 김치 건더기는 참 맛있다.

남편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아예 김치만으로 끓인 강된장찌개를 원한다. 된장에 지진 김치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인데, 강된장찌개의 야채 건더기를 모두 묵은 김치로만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김치의 시큼한 맛과 된장의 짭짤하고 구수한 맛이 어우러지면서, 여기에 멸치가 감칠맛을 더한다. 물론 다른 야채는 빠져도 마늘과 풋고추를 왕창 넣는 것은 동일하다.

이런 강된장찌개는 짠 반찬이라 한 끼에 많이 먹을 수는 없고, 냉장고에 두고 조금씩 데워 먹으면 좋은 밑반찬 구실을 한다. 어느 해 친구들과 중국으로 여행갔을 때 이 김치강된장찌개는 훌륭한 밑반찬이 되었다. 지친 여행길에서, 포장된 밥과 된장 맛 짭짤한 김치 건더기만으로도 훌륭하게 한 끼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역시 우리는 김치와 된장 힘으로 산다.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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