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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방관에서 참여로…사회를 바꾼다:'선거 무관심' 털고 세대교체 돌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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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획취재팀=이원호·백성호·손해용 기자 llhll@joongang.co.kr

나이는 20∼30대, 사회적으로는 포스트 386세대. 1987년 민주화 운동을 분수령으로 최루가스와 화염병을 모르는 세대. 이들은 '형' '선배'라는 동지적·위계적 호칭 대신 '오빠' '누나'가 자연스럽고 '나는 나일 뿐'이다.

그러나 인터넷 세상에서 이들은 하나의 동질체다. 붉은 악마의 함성에서 촛불 시위까지, 이어 드라마틱한 선거의 주역으로 떠오르기까지 엄청난 응집력으로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있다. 미래의 주역에서 오늘의 주역으로 성큼 다가선 2030세대를 들여다봤다.

◇옳다고 생각하면 나선다=이번 선거는 정책과 이념대결이 아닌 세대간 대결의 양상을 보였다. 바로 2030세대가 변화의 주인공이다.

지난 16일 오후 8시 신촌 대학가의 한 호프집.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대형 TV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러나 화면은 뮤직비디오나 축구 중계가 아닌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회다. 후보들의 논쟁은 곧 대학생들의 화두가 됐고, 즉석 토론회도 열렸다. 이들은 '정치 무관심 세대'가 아니었다.

지난 18일 오후 6시 KTF(한국통신프리텔) 로비. 젊은 직원들이 퇴근 인사로 "열심히 일한 당신, 찍어라"고 외치고 있다. 기성정치를 욕하던 대학생 등에게 투표 참여를 독려한 "열심히 욕한 당신, 찍어라"란 인터넷상의 구호를 빗댄 말이다. 그리고 19일 밤, 광화문은 노란 물결로 뒤덮였다. 붉은 셔츠를 입고 나왔던, 촛불을 들고 모였던 2030세대가 자신들의 파워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번 대선에서 2030세대의 노무현 후보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한 방송사가 실시한 출구조사에서 盧후보에 대한 이들의 지지율이 60%를 넘는다. 본사 여론조사팀의 D-2 조사에서도 盧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20대가 54.8%, 30대가 47.2%로 나타난 반면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22.8%와 27.4%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기관들은 李후보가 리드하던 선거 판세가 盧후보로 넘어간 주 요인으로 2030의 결집력을 들었다. 방관하던 세대가 직접 참여하면서 유권자의 절반인 젊은 표의 위력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20일 오후 2시 인터넷에는 "우리가 드디어 해냈다" "정치 방관자로 욕만 하고 투표를 멀리했던 2030이 한국 정치사를 바꿨다" "이젠 좌우익 이념분쟁, 지역마다 첨예한 갈등을 접자" 등의 게시물이 쏟아졌다.

민주당 미디어본부장인 김한길 전 의원은 "이번 대선에서 2030파워가 정치의 주류로 떠올라 여야 모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들은 평소 개인주의적이지만 어느 순간 하나의 방향성을 갖고 움직이는 역동적인 세대"라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세상을 본다=전문가들은 2030세대가 주류로 떠오른 배경으로 인터넷을 든다. 초고속 통신망 가입자 1천만명을 포함, 인터넷 이용자가 2천5백만명에 이르러 각종 소식과 담론들이 '빛의 속도'로 전파되고 검증된다.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 18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게시판에는 대선 관련물이 없다. 지지 후보를 밝히는 운동권 대자보가 게시판을 도배했던 예전과는 다른 풍경이다.

대학원생인 이강은(23·사회교육과 역사전공)씨는 "인터넷 때문에 소수 운동권이 담론을 주도했던 예전의 대선보다 학생들의 관심도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은자(21·서울대 역사교육과2)씨는 "요즘은 각종 취미 사이트에도 대선에 관한 글들이 많이 올라 여기저기 클릭하다 보면 후보와 정책 등을 저절로 접하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사이버대학 송재룡(사회복지학)교수는 "정치교육이 극히 제한된 국내에서 결과적으로 인터넷이 그 기능을 맡게 됐다"면서 "익명성을 전제로 한 사이버 공간이 수평적 분산력을 바탕으로 국가 현안의 토론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업가인 이승룡(33·경기도 안양시 관양동)씨는 "졸업과 함께 현실 정치에 무력감을 느꼈으나 인터넷을 통해 '정치적 동지'가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특정 사이트에만 접속하면 얼마든지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슈를 만들고 확산시킨다=어떤 이벤트가 이슈화되면 이들은 집단적 욕구 분출의 배출구로 활용한다.

서울대 홍두승(사회학)교수는 "평소에는 정치 현안에 팔짱을 끼고 외면하거나 다양한 목소리를 내다가도 변화의 단초나 큰 이벤트가 벌어지면 하나로 통일되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촛불 시위의 경우도 처음에 모인 인파는 적었다. 그러나 "월드컵 때만큼 나오면 막을 수 없다"는 전투경찰의 이야기가 인터넷에 떴고, 이후 참여 촉구 메시지가 확산되면서 14일 밤 광화문거리는 촛불의 바다를 이뤘다.

연세대 2년생인 이미영(21)씨는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반대 글이 인터넷에 쏟아지고, 최후의 승자를 뽑는 승부가 있고, 마지막의 반전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과정에서 내가 빠지면 손해란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정치이념이나 북한 등 거대 담론 대신 세대교체란 단순한 '정치철학'을 이슈화해 확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성균관대 4년생인 백민철(27)씨는 "우리 세대에게 정치는 거창한 구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독특한 문화와 생활에서 출발해 어떤 결론을 도출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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