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안부인사 그마저 안한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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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면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하는 친구에게 모처럼 안부 전화를 했다. 그는 손님이 너무 많다며 잠깐의 통화조차 부담스러워했다. 레스토랑에 사람이 너무 들지 않아 늘 시국과 불황을 탓하던 낙심천만한 얼굴만 대하던 터였다. 수화기 너머로 모처럼 생생하고도 싱싱한 북적거림을 느끼자 내 가슴이 즐겁게 불룩해졌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자조하곤 전화를 끊었다. "좋을 것 없어. 장사란 건, 뭐든 그래. 12월 한달 동안 죽도록 벌어서 그걸로 다음 해 열한 달을 버티는 거야."

그런데, 장사를 하나도 모르는 채로도 그 말이 한치한푼도 그른 것 같지 않았다. 책상에 매일 쌓이는 크리스마스 카드들을 보면서 나는 그 말이 정당했음을 낱낱이 실감하게 됐으니까.

12월의 책상엔 사랑하는 사람들, 너무 잘 지내다 소원해진 사람들, 그래서 아쉬운 사람들, 하나도 안 아쉬운 사람들, 평생 안부조차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 급기야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로부터 당도한 카드들이 고지서처럼 쌓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고, 모든 사랑은 변하며, 모든 기억엔 기한이 있다. 그러나, 12월이 주는, 흑인 가정의 은성한 식탁 같은 크리스마스, 갑자기 커진 마음들, 기쁜 일만 있으라는 불가능한 축복의 말들, 짧고도 다감하게 적힌 카드 글씨들은 삶의 유한함을 애석해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서 잊혀지기 싫다는 조촐한 반발, 쓸쓸한 날들 속에서 서로에게 안식이 되어야 한다는 가난한 지혜를 함께 보여준다.

더불어, 그동안 당신에게 소홀한 것을 이해해 달라고, 너무 바빠 자주 못만나도 당신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고 먼 데 사는 숙부처럼 어루만져주는 것도 같았다.

그러자 내가 만든 규칙으로만 세상이 움직여야 하고, 내 방식대로만 상대가 나를 대해야 한다던 가당찮은 미망에서 뭔가 눈을 떴달까, 마음의 용량이 한없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한번 만나는 데도 그토록 조율이 힘든 세상에 그 한 장의 카드, 연말의 짧은 축복의 언어만으로도 내년 한해 그를 사랑할 넉넉함이 생긴 것 같았다. 그건 무망한 호기로움이긴 하지만, 친구가 말한 비즈니스의 법칙처럼, 12월의 안부인사가 비즈니스라면 효용성이 아주 큰 비즈니스인 셈이다. 하지만, 그 뒷마당엔 더 이상 안부를 묻지 않음으로써 사랑하기를 그친 사람들의 면면도 함께 쓰러져 있는 것이다.

이충걸·『GQ코리아』편집장

norway@doo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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