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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변산의 비경, 부사의방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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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의방장에 있는 기왓장 조각.

먼저, 일러둘 게 있다. week&은 관할 부처의 협조 아래 부사의방장에 다녀올 수 있었다. 이번 취재는, 여느 여행지 소개와 전적으로 다르다. 부사의방장 접근은 법으로 막혀 있다. 부안군은 제한적이나마 개방을 바라고 있지만, 변산반도국립공원은 아직 계획이 없다. 군부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여 이번 기사는 전설의 명당을 최초로 공개하는 의미만 지닌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1 일행은 모두 12명이었다. week& 취재기자와 사진기자, 부안군청에서 4명, 변산반도국립공원에서 2명, 인근 군부대에서 2명. 취재에 동행한 인근 부대 소속의 부사관은 “변산에 좋은 데가 얼마나 많은데 …” 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부사의방장에서 올려다본 절벽. 20m 높이다

의상봉 정상에서 5분쯤 내려오자 남쪽 경사를 이루는 절벽이 나타났다. 이 절벽 아래에 부사의방장이 도사리고 있을 터이다. 절벽 바위 오른편으로 샛길이 나 있다. 일부러 조성한 탐방로는 아니다. 오랜 세월 사람의 발길이 남긴 흔적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양주영 주임은 “부사의방장은 변산에서 조난사고가 가장 자주 일어나는 위험지대”라며 투덜댔다. 양 주임의 불평은 일리가 있다. 직원 십수 명이 이 첩첩산중을 밤낮으로 지키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2 가파른 샛길을 따라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샛길을 따라 8m쯤 내려왔다. 바위 절벽 틈새에 소나무 몇 그루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 소나무 줄기에 흰 밧줄 몇 가닥이 묶여져 있다. 밧줄은 저 아래로 까마득히 내려져 있다.

“누가 묶었을까요?”

“아마도 증산도나 대순진리교 신도들일 겁니다. 군청에서 몇 번 전화를 받곤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려고 하는데 위치를 알려 달라고요.”

부안군청 최연곤 홍보계장의 설명이다. 전설처럼 존재하던 부사의방장의 위치를 확인한 건 1990년대 후반의 일이다. 학계 전문가들과 함께 현장 답사를 했고,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기록과 비교해 이 절벽 아래를 부사의방장이라고 확인했다. 그때도 여기엔 밧줄이 묶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부 종교에서 오랜 세월 비밀을 지키며 부사의방장을 성지처럼 숭배했던 것이다.


#3 밧줄에 의지해 바위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암벽 등반이 몸에 배지 않으면 쉽지 않은 길이었다. 한참 용을 쓴 끝에 두 발을 평평한 바위 바닥에 디딜 수 있었다. 12m. 국립공원 측에서 알려준 하강거리다.

밧줄 아래에는 폭 1m 정도의 공간이 절벽을 따라 길게 나 있었다. 그 1m 너머는, 말 그대로 허공이다. 그 허공 아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이고. 고개를 들어 산세를 둘러본다. 산수화 같은 마루금이 겹겹이 포개져 있다. 울금바위·옥녀봉·신선대·깃대봉 등 변산의 주요 봉우리도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를 가로막는 건 없다. 오로지 장쾌한 풍경만 펼쳐져 있다.

절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등을 최대한 절벽에 바짝 붙이고 게걸음을 걸었다. 그래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릎이 흔들렸다. 어렵사리 20m쯤 옆으로 나아가니 서너 평의 평평한 공간이 나온다. 부사의방장이다!

부사의방장 절벽에 박혀있는 쇠말뚝 뿌리.

#4 『삼국유사』에 따르면 부사의방장은 약 1400년 전 진표율사가 수행을 한 불교 성지다. 진표는 쪄서 말린 쌀 스무 말을 짊어지고 이 절벽으로 내려와 3년을 꼼짝 않고 용맹정진을 한다. 하나 기다리던 지장보살은 나타나지 않고, 진표는 낙심한 끝에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홀연히 나타나 그를 허공에서 받아 다시 여기로 올려놓는다. 그때부터 진표는 3·7일(21일)을 기약하고 온몸을 돌로 찧으며 기도하는 망신참법을 수행한다. 마침내 지장보살이 나타나 상처투성이인 그의 몸을 어루만졌고 그는 계(戒)를 얻는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지만, 부사의방장엔 놀랍게도 몇 가지 흔적이 남아 있다. 색 바랜 기왓장 조각이 바닥에 있고, 빗물을 받았을 법한 작은 바위 웅덩이도 있다. 가장 놀라운 건 절벽에 박힌 쇠말뚝 끄트머리다. 오랜 세월 박혀 있어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암자가 아니라면, 이 바위 절벽 중간에 쇠말뚝을 박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어지럼증이 일어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그래도 가부좌 틀고 앉아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애써 다독였다. 세상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곳은, 결국 세상의 눈으로 찾을 수 없는 곳이란 뜻이다. 이 천길 벼랑에 매달려 세상의 눈과 내 눈 사이의 거리, 그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가늠한다.

부사의방장 가는 길. 밧줄을 타고 12m를 내려가야 한다. 먼저 내려간 사진기자가 나중에 내려가는 취재기자를 찍었다.

#5 절벽 위로 오르는 길은 더 힘들었다. 경사가 100도를 넘었다. 일행이 밑에서 받쳐준 끝에 겨우 바위를 기어오를 수 있었다. 손톱 끝이 깨졌고, 팔과 다리 곳곳이 긁히고 멍이 들었다. 간신히 절벽 위에 올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에서 배어난 진땀으로 저고리가 축축했다.

이규보(1168∼1231)는 부사의방장을 다녀오고 나서 “평소에 한 길에 불과한 누대에 오를 때도 두통이 있고 정신이 아찔해 굽어볼 수 없었지만 만일 부사의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할 것 같았다”고 적었다. 부사의방장을 다녀온 소회가 천 년 전과 다르지 않다.



눈부신 흰꽃 상사화, 백제 최후 항거지 주류산성 … 볼 것 많은 부안

갓 피어난 위도상사화. 다음달 중순까지 개화한다

부안엔 이름난 곳이 허다하다. 전통의 명승지 적벽강과 채석강이 있고, 전나무 숲길 유명한 내소사가 있다. 최근엔 새로 생긴 길이 관광객을 불러모은다. 새만금 방조제가 마침내 뚫렸고, 그 방조제 왼쪽으로 전국적인 걷기 명소로 떠오른 변산 마실길이 나 있다. 그래도 부안엔 가볼 곳이 더 남아 있다. 아직 덜 알려졌을 뿐, 경치나 의미에서 밀리는 건 아니다. 부안이 여태 감춰두고 있는 비경 몇 곳을 공개한다.

부안의 늦여름을 상징하는 풍경이 있다. 위도 곳곳에 피어나는 상사화다. 위도에 피는 상사화는 유일하게 흰 꽃잎을 지녀 여느 상사화와 다르다. 하여 학술명도 위도상사화다.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품종이다. 8월 말 피기 시작해 9월 초순까지 사연 많고 곡절 많은 섬 위도를 위무한다. 섬에선 위도상사화를 ‘몸몰잇대’라 부른다.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지만, 섬 주민은 꽃이 지면 돋아났다 꽃이 피기 전에 시드는 잎사귀를 살짝 데쳐 나물로 해먹는다. 맛이 부드럽고 고소하단다.

부안이 거느린 사찰엔 내소사만 있는 게 아니다. 내소사보다 더 그윽한 개암사가 있다. 개암사도 좋지만, 개암사에서 1㎞ 가까이 내변산을 오르면 비경을 마주할 수 있다. 정상 언저리까지 올라가면 울금바위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서 있고, 그 울금바위 아래 큼지막한 바위굴이 있다. 이름하여 원효방(元曉房)이다. 원효대사가 여기서 암자를 짓고 불법을 강의했는데 이 바위굴 앞에 군중 수백 명이 모여들어 문자 그대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의 풍경을 자아냈단다. 원효방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바위 틈을 비집고 새나오는 물이다. 오로지 한 사람이 하루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만 흘러나온다. 그 물을 받아 마시며 원효가 수도를 했다고 전해온다. 울금바위 위에 올라서면 산자락 따라 이어진 산성이 내려다보인다. 주류산성이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4년이나 백제 유민이 여기 내변산 깊숙한 오지에 산성을 쌓고 신라와 맞서 싸웠다. 백제의 마지막 풍경은 삼천 궁녀가 뛰어내렸다는 부여의 낙화암이 아니다. 여기 내변산 안쪽 기슭이다.

부안 남쪽의 곰소는 젓갈만 유명한 게 아니다. 곰소만 동쪽으로 펼쳐진 줄포 갯벌이 올 2월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다. 우리나라에서 14번째 기록이다. 줄포 갯벌에 자연생태공원이 조성돼 있다. 버려진 갯벌에 야생화를 심고 연못을 파고 갈대밭을 일궈 어엿한 생태공원의 모양새를 갖췄다. 온갖 종류의 해양생물은 물론이고 오소리 같은 야생동물도 산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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