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아톤'서 자폐아 연기 조승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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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에게 장애인 역할이란 모, 아니면 도밖에 없다. 단숨에 연기파 배우로 떠오르거나, 아니면 망하거나. 신인배우에겐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인기든, 연기력이든 이미 한 단계 위에 서 있는 배우에겐 모험일 수 있다. 배우 조승우(25)에게 영화 '말아톤'(27일 개봉)은 분명 도 아닌 모다.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자폐아가 마라톤을 통해 세상과 말을 거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이 영화에서 조승우는 자폐아 마라토너 윤초원 역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해냈기 때문이다. 조승우를 20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자연스레 그의 실감나는 자폐아 연기로 얘기가 시작됐다.

"이번 연기의 축은 실제 주인공인 형진이(배형진)에요. 자폐아는 어둡고 침울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꼬마처럼 밝고 순수하더라고요. 촬영 전에 자주 만나 밥도 먹고, 선물도 사 줬는데 정작 촬영에 들어가고 나서는 일부러 안 만났어요. 자폐아의 외적 모습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자꾸 만나면 형진이의 겉모습만 흉내 낼 것 같아 두렵더라고요. "

형진이가 다녔던 자폐아학교 육영학교도 그래서 딱 한번 가봤단다.

"영화에 들어가면서 신경 썼던 부분은 어떻게 하면 좀더 자폐아처럼 보일 수 있을까가 아니라, 오히려 자폐아 연기의 정답은 무엇무엇이라는 고정관념을 어떻게 깰 수 있을까 라는 거였어요. 결론은 답이 없다는 거죠. 정형화된 틀도 없고 공식도 없으니. "

이렇게 맘 먹자 연기가 자유로워졌다.

"이번 영화 속에 나오는 제 대사 중에서는 애드리브(즉흥연기)가 절반이에요. 내 스타일이 아닌데, 처음으로 자유롭게 내 감정을 표현하고 대사를 내뱉었어요. 카메라는 저에게 항상 버거운 존재거든요. 근데 앵글 안에서 자유롭더라고요. "

재능과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미 뮤지컬에서는 '지킬 앤 하이드'를 통해 폭발적인 관객 동원력까지 인정받았던 조승우지만 유독 영화에서는 흥행과 거리가 멀었다. 조승우는 "흥행 때문에 미래를 불안해하면 연기에 방해받지 않겠느냐"며 흥행에 무심한 듯하다가 "이번엔 흥행도 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흥행을 의식하고 작품을 선택한 적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출연했던 작품은 다 저한테 '꽂혔던' 작품이에요. 남들은 왜 일부러 평범하지 않은 것만 고르느냐고 묻는데 그건 이미 닦인 등산코스처럼 남이 간 길은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남들이 가지 않은 길, 내가 헤쳐가면서 가고 싶어요. 시야를 가로막는 가지를 치는 게 재밌기도 하거니와 어떤 길이 나올지 모르기에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싶은 적당한 긴장감이 나를 지탱해줘요. 내가 잘 할 수 있는 역할만 한다면 나태해지지 않을까요. "

"한번도 스타를 꿈꾸지 않았고 스타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이 네모 반듯한 젊은이에게 "배우는 팬 없이 존재할 수 없고, 팬이 많은 게 스타 아니냐"고 삐딱하게 물었다. 그래도 답은 또 반듯했다.

"내가 스타로 불리는 게 '닭살'스러워요. 그렇게 불리느니 차라리 그렇게 싫어했던 '이도령'으로 불리는 게 나아요. "란다.

'춘향뎐'(2000)의 이도령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그를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 은인인 동시에 굴레였다. 이도령 캐릭터가 오래도록 조승우를 따라다니며 그를 가둬버렸기 때문이다. 조승우는 '말아톤'으로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나, 어쩌면 또 초원이가 당분간 그를 가둬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의 초원이 연기는 인상적이기에.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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