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한 직장 … '77세 할머니 경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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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시 항동 남해고속에서 이명훈 할머니가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다.목포=양광삼 기자

"이 나이에도 건강하고 매일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

올해 희수(喜壽.77세)의 할머니가 40년째 한 회사에 근무하고 있어 부러움을 사고 있다. 목포항을 중심으로 서해 남부 섬에 여객선 10척을 운항하는 ㈜남해고속의 목포시 항동 본사에서 일하는 이명훈 할머니가 주인공.

초등학교 졸업 후 만주로 건너가 연길여고를 다니다 17세 때 해방을 맞아 귀국한 이 할머니는 결혼 전 한 해운회사에서 근무한 것이 인연이 돼 37세 때 ㈜남해고속에 입사했다.

그 뒤 지금까지 줄곧 승선료 정산을 비롯한 경리 업무와 회장 비서 역할을 맡고 있다. 요즘도 회장실에 딸린 두어평짜리 사무실에서 전자계산기 대신 주판을 이용해 계산하고 컴퓨터 대신 손으로 장부를 정리하며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할머니는 오전 8시30분쯤 출근해 직원들이 퇴근한 오후 8시쯤까지 사무실을 지킨다. 휴일 고객이 많은 회사의 특성상 일요일도 한 달에 두 번은 출근한다

회사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게 꿰고 있지만 이 할머니는 "40년을 다닌 회사이고, 조금 실수한다고 탓할 사람도 없지만 매사가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회사 직원 100여명 중 최고령이고 사주인 나광수(58) 회장보다도 19세가 많다. 할머니가 입사할 때 대학생이던 나 회장은 편하게 '아줌마'라고 부른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이여사님'이라고 호칭한다.

이 할머니가 직장을 그만둘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8년 외환위기 때 회사 경영이 어렵자 스스로 사표를 냈다. 그러나 나 회장은 "현금을 다루는 우리 회사에선 꼼꼼하고 깨끗하게 일 처리하는 분이 꼭 필요하다"며 그 자리에서 사표를 되돌려줬다.

5년 전 남편을 여의고 딸과 함께 목포시 산정동에서 사는 이 할머니는 "몸이 몹시 아파 아침에 출근하지 못하면 오후에라도 나와야 직성이 풀린다"고 말했다. 세 딸이 '회사 그만다니고 편하게 사시라'고 권하지만 집보다 사무실이 더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이 할머니는 "직장 덕분에 자식들 공부시키고 출가시켰고, 늙어서도 경제적으로 내 앞가림하고 자식과 손자.손녀에게 용돈을 쥐여줄 수 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최근 들어 '장수 재직'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불황으로 유능한 젊은이조차 일자리를 못 얻는 상황에서 나이 많은 사람이 월급만 축낸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합니다."

이 할머니는 "고생을 안 해봐 그런지 쉬운 일만 찾고 조금만 조건이 좋으면 금방 자리를 옮긴다. 진득함이 없는 것 같다"며 젊은이들에게 충고했다.

목포=이해석 기자<lhsaa@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yks23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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