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어른들 영정 만들어 주는 사업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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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일요일인 지난 8일 오전 11시 충북 영동군 황간면 신탄리 마을회관. 노인 10여명이 옷을 곱게 차려 입고 사진을 찍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여기를 보고 웃으세요.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40대 사진기사가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그러자 노인들은 "늙은이가 뭐가 좋다고 웃어. 그냥 빨리 찍어"라며 퉁명스럽게 대했다. 하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사진기사는 대전에서 의료종합컨설팅업체인 'S·플러스'를 운영하는 안정준(安正濬·45·서구 탄방동)씨. 그는 올해 초부터 고향마을 노인들에게 무료로 영정(影幀)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는 어머니 김정동(76)씨의 영정을 직접 제작해 주고 싶어 자신이 애용하는 F-4니콘 카메라를 들고 고향을 찾았다. 어머니의 사진을 찍은 뒤 남은 필름으로 그는 이웃 노인 몇명을 촬영했다.

"사진 찍는 기술로 뭔가 효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 영정을 만들게 됐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소문이 나서 아예 영정 제작에 나섰죠."

고교 때 고향을 떠난 그는 경기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직장 생활·개인 사업 등을 하다 5년 전 취미로 카메라를 배웠다. 사진동호회 등을 찾아다니며 사진기술을 배우고 틈틈이 야외로 나가 연습 촬영을 했다. 덕분에 그는 전국사진작가협회가 주최하는 촬영대회에서 10여 차례 입상하는 등 사진전문가가 됐다.

그는 휴일·평일을 가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고향마을을 찾는다. 고향마을인 황간면은 물론 인근 상촌면 노인들의 영정을 그가 만들어 주었다. 지난 1년간 고급 액자에 담아 전달한 영정(개당 5만여원)만도 2백개나 된다. 마을 이장들이 영정 제작에 도움을 준다. 安씨는 "영정을 받아들고 고마워하는 노인들을 보면 흐뭇하다"며 "40여년간 교직생활을 하다 1991년 세상을 뜬 부친에게 못다한 효도를 한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한 뒤 평소 즐기던 사진동호회 활동을 중단했다. 내년에도 뜻을 같이 하는 동료 사진작가와 함께 영동군 전체 노인의 영정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영동=김방현 기자

kbh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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