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윈튼의 중성적 이미지 새삼 돋보이는 스릴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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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올란도'(1992년)를 보고 나서였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영화화한 '올란도'에서 스윈튼은 자신의 성(性)을 자유롭게 바꾼다. 남성과 여성을 오가면서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역할이다. 영화를 보면 공감하겠지만, 이 배역은 스윈튼이 아니면 연기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스윈튼은 중성적 이미지를 지닌 배우로 기억된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낮은 목소리는 매혹적이다. 근작 '딥 엔드'에서 그녀는 변신을 시도한다. 평범한 중산층 주부 마거릿을 연기하고 있다.

마거릿은 세 아이와 시아버지를 돌보는 중이다. 남편은 해군에 근무하는 탓에 가정에 소홀하다. 마거릿은 고등학생인 아들이 한 중년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어느날 남자는 그녀가 살고 있는 호숫가 저택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마거릿은 아들이 살인한 것이라 짐작하고 시체를 감춘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딥 엔드'는 스릴러다. 스윈튼이 연기한 여성 캐릭터는 낯설지 않다. '에일리언'이나 '델마와 루이스'속의 캐릭터처럼 강인하고 전사의 풍모를 지니고 있으므로. 영화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범죄 현장에 뛰어든 어머니 이야기다. 그녀는 아들의 혐의를 이용해 돈을 가로채려는 악한들과 거래를 벌인다.

아들이 실제로 죄인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어머니는 일편단심으로 아들을 보호하려고 애쓴다. 이렇듯 무고한 자가 혐의를 뒤집어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연속은 '사이코'(60년) 등을 만든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전문 분야였다.

'딥 엔드'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영화 속 주부는 어느 악당과 친구가 되며, 그 악당은 이 헌신적인 여성에 감복해 다른 살인극을 벌인다. 코미디 아닌가? 전혀. '딥 엔드'는 오히려 선악의 문제에 대한 고민거리를 던진다. 범죄극에 휘말린 주부, 인간미 넘치는 악한의 대비를 통해 깔끔한 선악 구분이란 애시당초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깊이있는 '캐릭터'의 힘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원제 The Deep End. 2001년작. 감독 데이비드 시겔.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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