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떠도는 論介의 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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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얼마 전 '해주 최씨 전남 화순군 최경진 종회장'을 발신자로 한 편지가 날아들었다. 우선 봉투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뜯어본 사연인즉슨, 왜적장 사당에 안치된 '朱論介墓碑石(주논개묘비석)'을 한국에 반환할 수 있도록 여론 조성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편지 갈피에 끼여 있던 사진 하나가 뚝 떨어졌다. 왜적장과 그의 부인·처제 묘와 그 옆에 자리한 논개의 묘비를 담은 것이었는데 '치욕의 현장'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진주에서 초혼(招魂)해간…'이란 설명도 묘한 느낌으로 다가섰다.

문중의 최재양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말은 원망으로 가득했다. "논개가 왜적장의 현지처로 전락하고 심지어 거기 와서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식의 잡신 취급을 받는 걸 그냥 방치할 수 있습니까? 청와대·외교통상부·문화관광부 등에 탄원만 무려 마흔일곱 차례 했는데 모두 허사였습니다. "

사연은 1970년대 초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우에스카 하쿠(上塚博男)는 후쿠오카(福岡) 소재 히코(英彦)산 기슭 자신의 땅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와 관련된 두개의 비석을 발견했다. 우에스카는 바로 게야무라의 행적 추적을 시작했고 결국 그가 임진왜란 때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면서 그는 '게야무라-논개'의 연결고리를 찾아갔다.

우에스카는 73년 진주 남강에서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위로하는 의식을 올렸다. 사당을 짓기 위해 장수에서 돌을, 진주에서 모래를 실어 갔다는 얘기도 있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의 진혼제를 두 나라의 역사 응어리를 푸는 상징으로 간주하자'는 우에스카의 말에 우리가 넘어간 구석도 없지 않은 듯하다.

다시 최재양옹의 말을 옮겨보자. "우에스카는 76년 보수원(寶壽院)이란 이름의 사당을 완공하면서 '한·일 군관민 합동 진혼제'를 열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측 인사도 상당수 참여했고 감사패까지 주어졌습니다. 그 땐 몰라서 그랬다고 칩시다. 우에스카의 교묘한 계산이 다 드러난 지금, 그것을 그냥 버려둔다면 민족적 수치 아닙니까. "

정부가 적극 대응하기는 좀 곤란한 부분도 있을 터다. 특히 우에스카가 '보수원의 논개 관련 물품은 한국에서 1천만엔을 주고 사온 사유재산'이라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매듭을 풀기 쉽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초혼의 미신적 의미를 인정한다면 논개의 영혼은 우리 땅을 떠나 낯선 일본의 보수원 사당에 30년 가까이 떠돌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본래 논개는 '경남 진주의 관기'(유몽인의 『어우야담』 1621년)로 통했다. 그러다가 호남의 선비들이 엮은 『호남절의록』(1799년)과 해주 최씨 족보 등을 통해 '전북 장수 출신으로 최경회 장군의 소실'이라는 주장에 부닥쳤다. 해주 최씨 문중에서 여기에 매달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논개의 성(姓)을 놓고서도 '주(朱)'말고도 '노( 盧 또는 魯)'라는 설이 따라다닌다.

이런 시시비비를 떠나 논개는 '우리들 마음 속의 절개'로 자리하고 있다. 조선 말기의 우국지사 매천 황현은 물론 근대 들어 수주 변영로·만해 한용운 등 수많은 문사들이 시와 글을 남긴 것은 같은 맥락에서다. 하지만 정작 논개의 넋이 우리 땅 진주시 촉석루 사당에도, 장수군에 복원된 생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유명한 변영로의 시 '논개'의 1∼2연이 문득 더 애절하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huhed@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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