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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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공개된 한.일 협정 문서는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춘다. 식민 지배자 일본이 "피해 보상은 없다. 경제협력만 있다"고 우겼음에도 이를 제대로 따지지 못했다. 강제로 끌려간 징용자들의 피와 땀을 대가로 협상을 벌였지만 돈을 손에 쥔 뒤 피해자들에겐 쥐꼬리만큼만 보상해줬다. 그 결과 논란은 40년 동안 계속되고 유족들은 한을 안고 있다. 부실.부도덕.불투명한 협상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문서를 보면 1964년 6월 3일 서울에 학생.시민 1만여명이 모여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 이유를 수긍하게 된다. '졸속협상''구걸외교'라는 지적을 받아도 정부로선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정치권과 학계, 관련 단체도 놀라고 분노하고 있다. 161개 관련 문서 가운데 5개 문서만 공개됐는 데도 상황이 이렇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처했던 형편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60년대 초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P)은 세계 100위 수준이었다. 62년 1인당 GNP는 87달러, 63년 100달러, 64년 103달러, 65년 105달러…. 국민총생산은 62년 23억달러에서 65년 30억달러 수준이었다. 당시 경제성장률에 관한 자료는 한국은행에도 없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남녀들이 독일의 탄광 광원.간호사로 떠나고 그들을 위로하러 간 대통령이 눈물을 뿌렸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이런 형편에 다시는 만지기 힘든 목돈을 마련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록 피해자들의 눈물이 배어 있는 돈이지만 국가 발전과 후손의 미래를 위해 경제 건설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아니었을까.

협상의 결과로 들어온 8억달러는 40년 뒤 2004년 한국의 1인당 GNP 1만1400달러(세계은행)의 초석이 됐다. 오늘 우리가 수교 협상과 자금 처리 과정을 한마디로 매도할 수 없는 이유다.

가정을 해보자. 일본과 수교가 이뤄진 뒤 북한이 청구권 자금으로 수억달러를 받아 모두 피해자에게 나눠주면 어떻게 될까. 경제 발전은 엄두도 못 낼 것이다. 북한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어려운 결단임이 분명하다.

안성규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