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를 창의성과 성취욕 갖춘 장인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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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호 08면

1 오필리어(1851~52), 존 에버렛 밀레이(1829~96) 작, 캔버스에 유채, 76x112㎝, 테이트 브리튼, 런던

“그 애는 꽃으로 만든 관을 늘어진 나뭇가지에 걸려고 기어오르다, 심술궂은 가지가 부러져 화환과 함께 흐느끼는 시냇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구나. 옷이 활짝 펴져서 잠시 인어처럼 물에 떠 있는 동안 그 애는 자신의 불행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면 본래 물 속에 태어나고 자란 존재처럼, 옛 노래 몇 절을 불렀다는구나.”

문소영 기자의 명화로 보는 경제사 한 장면 <11> 산업화가 초래한 기계적 대량생산에 대한 반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에서 오필리어의 죽음을 설명하는 위의 대사를 충실히 묘사한 그림이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어’(1851~1852·사진 1)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참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독한 정신적 고통으로 실성한 오필리어가 이제 그 고통으로부터의 서글픈 해방을 앞두고 짓는 저 미묘한 표정에 대해서. 또는, 이 그림의 모델이었고, 오필리어만큼 아름답고 또 불행했던 여인 엘리자베스 시달에 대해서. 그리고 이 그림을 인용한 많은 영화와 뮤직비디오 장면들에 대해서.

하지만 오늘 이 그림에서 초점을 맞출 것은 오필리어를 둘러싼 자연의 묘사다. 마치 영국 시골의 어느 평범한 개울가를 실제로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이 그림의 수초와 덤불은 현실적이고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그래서 자연의 품에 안기듯 죽음을 받아들이는 오필리어의 표정이 설득력 있게 다가올 뿐만 아니라 이 고전 비극의 여주인공이 현실에 나타나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게 된다.

2 존 러스킨의 초상화(1853~54), 존 에버렛 밀레이(1829~96) 작, 캔버스에 유채, 78.7x68㎝, 개인 소장3 윌리엄 모리스(1834~ 96)의 패턴 디자인

이렇게 아카데미 전통의 정형화되고 이상화된 자연 묘사와는 다른, 사실적이고 정교한 자연의 묘사가, 밀레이가 속했던 화가 그룹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특징이었다. 이 그룹의 기묘한 이름은, 미술 아카데미가 교본으로 삼았던 르네상스 대가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르네상스 화가들이 세워놓은 그림 기법 규칙들을 벗어나서, 원점으로 돌아가 자연을 충실히 관찰하고 중세화가들처럼 소박하게 따르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대의 미술평론가이자 사회경제학자인 존 러스킨(1819~1900)에게서 영향받은 것이었다. 러스킨은 산업화에 대해, 특히 산업화가 초래한 기계적인 대량생산에 대해 혐오감을 가졌고 그 대안을 자연과 중세 장인들에게서 찾았다. 밀레이가 러스킨을 그린 초상화(사진2)는 그야말로 러스킨의, 러스킨을 위한,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러스킨에 의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스킨 뒤 계곡의 물줄기 하나, 바위의 결 하나가 정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자연에 진실해야 한다는 러스킨의 생각을 그림으로 구체화한 셈이다.

그런데 얄궂은 일이지만, 이 초상화를 그리면서 밀레이는 러스킨의 아내인 에피와 사랑에 빠졌다. 결국 에피는 초상화가 완성된 해 러스킨과 이혼하고 밀레이와 결혼했다. 밀레이의 변명을 해주자면 그가 아니었더라도 러스킨 부부의 파경은 예정돼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러스킨 부부는 한 번도 육체관계를 갖지 않았는데 러스킨의 기피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그 이유는 러스킨이 그림 속의 이상적인 누드와 다른 현실의 누드를 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고. 이것은 자연에 진실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어긋나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 뒤로 밀레이와 러스킨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밀레이는 라파엘전파의 정신과 화풍에서 점차 벗어나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아카데미 원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러스킨의 사상을 끝까지 충실하게 실현한 미술가는 따로 있었다. 그는 바로 대량생산에 반발해서 미술공예운동(Arts & Crafts Movement)을 주도한 윌리엄 모리스(1834~1896)였다. 그는 러스킨이 건축과 사회윤리가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에 대해 쓴 책들을 보고 감명을 받아 건축가를 꿈꾸다가 라파엘전파의 영향을 받아 화가로 전환했다. 하지만 아틀리에에 갇힌 화가로서는 보편적인 인류의 일상생활에 아름다움이 깃들게 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서 장식미술을 다루게 되었다. 그러니 모리스는 일상생활을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철학을 뚜렷하게 내세운 거의 최초의 디자이너인 셈이다.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은 러스킨의 ‘이상적인 장인’에 대한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산업혁명과 그로 인한 기계적인 대량생산에 거부감을 가진 러스킨은 중세 장인들이 태피스트리, 가구, 교회 벽면의 장식 하나 하나를 정성 들여 만들고 거기에 자연에서 관찰한 갖가지 패턴을 반영해 넣은 것을 예찬했다.

러스킨은 제조업 노동자가 모두 이런 장인이 될 수 있을 때 이상적인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산업혁명 시대의 공장 노동자의 모습, 마치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나사 죄는 것만 반복하다가 기계의 부속품처럼 전락하는 찰리 채플린 같은 그 모습에 러스킨은 개탄했고 분노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분업으로 인한 효율 극대화를 추구한 고전주의 경제학을 배척했다. 사실 분업의 효율성을 제창한 애덤 스미스도 노동자들이 기계화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나타냈었다. 스미스는 대안으로 공공교육을 제시했는데, 러스킨은 나중에 미술평론을 집어치우고 공공교육을 포함한 사회복지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모리스는 이런 러스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모리스의 패턴 디자인들(사진3)을 보면 자연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중세 태피스트리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벽지와 직물의 패턴 디자인부터 가구와 스테인드 글라스까지 모든 실내장식 미술을 폭넓게 다루고 이를 위한 회사 모리스 상회도 설립했다. 이 상회에서 일하는 모리스와 동료들은 이곳을 획일화된 기계 생산공정으로 빼앗긴 창조적 노동과 그로 인한 노동의 기쁨을 되찾은 미술노동자들의 공간이라고 자처했다.

모리스의 유미주의적인 미술공예운동은 사회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기계문명에서 부속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지위를 끌어올린다는 철학에서 사회주의와 관련이 없지 않았다. 모리스는 공장지대를 돌며 사회주의를 전파하곤 했다.

그러나 러스킨과 모리스의 사상은 낭만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고 모순도 내포하고 있었다. 모리스의 정성 들인 공예작품은 그만큼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었고 부유한 중산층 이상이나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중세 장인들의 작품도 교회나 귀족의 소유물이 아니었던가. 실제로 러스킨과 모리스의 현실 개혁 운동은 한계에 부닥치곤 했다. 반면에 노동자의 지위를 창의성과 성취욕을 갖춘 장인의 지위로 끌어올리고자 했던 그들의 정신은 현대에도 살아있다.


영자신문 중앙데일리 문화팀장. 경제학 석사로 일상 속에서 명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관련 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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