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곡절 담은‘역사의 문’이 깨어난다, 미래로 가는‘빛의 문’이 열린다
100년 전 경복궁 전각의 지붕들은 파도처럼 넘실댔다. 1876년 내전에 불이 나 교태전·강녕전 등이 소실됐어도 웅장한 자태를 자랑했다.
1996년 11월 김영삼 정부 시절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어내는 모습.
◆왜란으로 소실=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은 폐허가 된다. 『선조수정실록』에 왕과 조정이 궐을 버리고 피란한 뒤 ‘백성이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백성 방화설은 식민사관에 의해 강화됐으며, 당시 정황과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왜군 방화설이 더욱 설득력 있다는 게 근래의 해석이다.
전쟁에 참여한 종군승(從軍僧) 제다쿠는 ‘조선일기’에 왜군이 한양에 입성한 직후 경복궁의 모습을 보고 ‘용이 사는 곳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구분할 수 없다’고 기록했다. 이 밖에 여러 자료가 왜군이 한양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경복궁이 온전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의 경복궁.
중건 이후에도 경복궁은 여러 차례 화재에 시달렸다.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암살한 을미사변(1895년)이 벌어지고,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경복궁은 빛을 잃는다.
혜촌 김학수의 북궐도(1975년).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을 ‘북궐도형’을 토대로 그린 상상도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우동선(미술원 건축과) 교수는 “서울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중심으로 경복궁이 갖는 장소의 상징성이 컸기 때문에 일제가 이를 차지하려 든 것”이라고 말했다.
광화문도 매각하려 했지만 일본 지식인조차 반대하는 바람에 이듬해 건춘문(경복궁 동문) 북쪽으로 옮긴다. 자리를 옮긴 광화문은 2년 뒤 열린 조선박람회 정문으로 쓰였다. 경복궁에서 뜯겨나간 전각은 일본 사찰, 요정, 미술관 등으로 변용되거나 건축용 부재로 쓰였다. 궁궐 밖으로 나간 전각 356동 중 해방 직후 남은 것은 7동에 불과했다. 궁궐 안엔 광화문, 근정전 등 40동가량만 남아 있었다.
◆부활하는 경복궁=경복궁이 마지막으로 중건된 고종 당시를 복원 시점으로 설정한 경복궁 복원계획이 수립된 게 1989년이다. 지난 20년간 침전·동궁·흥례문·광화문 권역이 차례차례 복원됐다.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어냈다. 2010년 현재, 경복궁은 고종 중건 당시의 25% 수준까지 회복됐다. 문화재청은 내년부터 다시 20년간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을 추진한다.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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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기자
“포만 세 번 바꿔 … 광화문, 1000년 이상 갈 겁니다”
20년 역사 이끈 신응수 대목장
“광화문은 이제 1000년 이상 갈 겁니다.”
“조선총독부 건물 없애고 광화문까지 살려놓으니 북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와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외국인 관람객도 엄청 늘었어요. 그 전엔 허허벌판이라 볼 게 없었죠.”
“원래 공사가 2009년 완료될 예정이었잖아요. 그러다 발굴 기간이 길어지면서 1년 뒤로 넉넉히 잡았던 거지, 아무 문제 없어요. 광복절에 공개하는 게 이왕이면 뜻도 좋죠. 경복궁은 일제가 다 망친 거니까요. 광화문도 일제가 제자리에 뒀으면 6·25 때 피폭되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공기가 늦춰지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단다. 잘라놓은 나무가 지나치게 건조돼 비틀어졌다는 것이다.
“포(包·처마를 받쳐주는 짧은 부재)만 해도 세 번이나 바꿨어요. 빨리 작업해 맞춰야지, 소나무가 성깔이 있어서 놔두면 자꾸 돌아가거든요.”
그는 꼼꼼하기로 유명하다. 복원에 참고한 누각 1층 내부 사진이 광화문이 아니라 흥인지문(동대문)이라는 게 뒤늦게 확인되자 공사한 걸 죄다 뜯어 다시 지었다.
“밖에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문양도 아주 조금 달라요. 그래도 고종 때 한 것을 복원의 기준으로 삼았으니 그것에 맞춰야죠.”
그는 한글 현판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글학회 등에 대해서도 “복원의 원칙을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승님(조원재·이광규)이 ‘큰일 하는 사람은 수(壽)를 감한다’고 하셨어요. 해보니 중압감이 커요. 내 손으로 몇 백 년 된 나무를 베어야 해 마음이 편치 못하고, 궁궐 중에서도 기가 세다는 경복궁을 복원하는 기간 동안엔 특히나 음해도 받고 서운한 일도 많았어요. 그래도 누구보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고 있잖아요.”
이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