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든 몸 씻어주는 내 고향 제주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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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해가 수평선 위의 구름 속에 들어가면서 불지른 듯 순식간에 붉은 노을이 타오른다.(중략) 그리고 그 불타는 노을을 향해 무슨 예감처럼 쏜살같이 날아가는 작은 새 한 마리… 장엄한 빛의 파노라마 속에 까마득한 소실점으로 사라져가는 작은 새, 무슨 뜻일까? 문득 눈물이 솟구친다. 영혼의 복판을 꿰뚫는 듯한 아픔. 내 영혼이 순간적으로 어떤 근원적인 것, 우주적인 것에 가 닿은 듯한 느낌이다. 이 까닭 모를 슬픔을 위하여 나는 다시 술잔을 비운다."('바다와 술잔'중)

전국체전이 제주도에서 개막되던 지난 9일 오후 소설가 현기영(62)씨는 서울서 전주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 있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서 전주에서 열리는 전국 민족문학인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버스 안 TV를 통해 전국체전 개막식을 지켜보던 현씨의 눈은 점점 고향인 제주 바다 수평선을 닮아가고 있었다. 타향살이 40여년에 하루도 고향인 제주도를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 그렇게 고향을 소재로 작품활동을 펼쳐온 현씨가 최근 펴낸 산문집 『바다와 술잔』에도 제주에 대한 그리움과 깨우침으로 가득하다.

"이 책은 그동안 나의 소설들이 보여주지 못한 나의 어쭙잖은 내면 풍경"이라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 5부로 나눠 41편의 산문을 싣고 있는 이 책은 소설로써는 말할 수 없는 작가의 진솔한 고백이다. 특히 1978년 제주 4·3항쟁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을 발표하면서부터 비판적 역사의식으로만 바라보았던 제주도를 이번 산문집에서는 모태의, 전설의 섬으로 돌려놓고 있다.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서, 태고의 어느 날 문득 화산 폭발로 솟아오른 화산도인지라 땅이 척박했고, 땅이 척박한 만큼이나 인간들 또한 강인하고 표한(剽悍)했다. 이 궁벽한 변방 땅에 대해 전시대 중앙 권력의 수탈과 억압은 얼마나 가혹했던가."('저 거친 초원의 바람 속에서'중)

현씨에게 있어 제주도는 중앙권력의 가혹한 수탈과 억압의 섬이었다.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모순적 상황이 첨예하게 축약된 곳이기에 제주도 이야기를 함으로써 한반도의 보편적 상황의 진실에 접근해보자는 것이 현씨의 소설적 전략이었다. 구한말 외세에 맞서 제주도에서 민중항쟁을 일으켰던 이재수의 난을 그린 '변방에 우짖는 새'가 나온 것은 이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일제시대 해녀들의 항일투쟁을 다룬 '바람 타는 섬'이 나왔고 그 공동체 정신과 투쟁정신의 연장선상에서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4·3항쟁을 다룬 '순이 삼촌'이 나온 것이다. 현씨에게 있어 그의 고향은 그런 역사적 사실의 취재공간이었다. 그러나 '바다와 술잔'에서의 제주도는 그런 역사공간이면서도 태고의 공간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제 다시 나는 그 바다로 가봐야 하겠다. 출렁거리며 들려주는 그 영원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거친 파도와 강인한 현무암의 영원한 투쟁을 보기 위해서, 바람이 막힘 없이 불어오는 그 드넓은 쪽빛 공간에 몸을 담기 위해서, 거기에 몸을 담고 나의 혼탁하고 부정한 핏줄을 정화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그 바다로 가야겠다."('바다와 술잔'중)

노을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소줏잔에 뜬 수평선을 마시며 이제 삶의 깊이와 황홀을 맛보겠다한다. 해서 현씨의 이번 산문집은 쪽빛 공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예나 지금이나, 전생인 듯 현생이 듯 들려주듯 삶의 비밀도 속삭이고 있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bacch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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