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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失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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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베를린 시내를 걷다 보면 가끔 이름 앞에 'Dr. Dr. '라고 쓰인 문패를 발견하게 된다. 명함도 마찬가지다. 박사학위를 두개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만일 그가 대학교수라면 'Prof. Dr. Dr. '로 수식어가 더 길어진다. 좀 촌스럽긴 하지만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독일인들의 단면이 잘 드러난다.

하기야 박사학위가 자랑스러운 게 어디 독일만의 얘기일까. 어떤 학문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에게 주는 박사학위는 언제, 어디서나 최고의 학식과 명예의 상징이다. 학문뿐 아니라 일상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에게도 박사란 애칭을 붙여준다. 뭐든지 다 아는 사람을 만물박사로 부르는 식이다. 일본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이 경우 보통 박사를 뜻하는 '하쿠시' 대신 '하카세'라 부르기도 한다.

박사(博士)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135년 한나라 무제(武帝) 때다. 태학(太學)의 교관을 박사라 불렀는데, 이 가운데 시경·서경·역경·춘추·예기 등 오경(五經)에 능한 사람을 오경박사라 하여 특히 중시했다. 고구려와 백제도 이를 본떠 박사제도를 두어 학문과 기술을 장려했다. 일본에 한문을 전수한 왕인(王仁)박사가 특히 유명했다.

서양에선 1150년께 파리대학이 신학분야에 박사를 수여한 것을 효시로 친다. 박사를 뜻하는 '닥터'란 말은 교사를 뜻하는 중세 라틴어 'doctor'를 그대로 쓴 것이다. 의사를 박사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로 고등교육을 받은 의사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근대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박사도 의학박사였다.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가 1893년 미국 컬럼비아 의대에서 세균학을 연구, 한국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여성으로는 1900년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 에스더(본명 金點童)여사가 처음이다. 국내에선 1952년 서울대가 논문박사제에 따라 최초의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후 박사학위 수여자가 해마다 늘어 지금은 한해 8천여명의 박사가 국내외에서 쏟아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박사에 대한 대접도 많이 달라졌다. 취업난이 계속되면서 박사실업이란 말이 등장한 지가 오래다.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되는 인문계 출신들이 특히 고전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요즘 각 기업들이 박사 등 고학력자들을 우대는커녕 오히려 기피한다는 보도다.

이제 박사님들이 운전하는 택시를 탈 날도 멀지않은 느낌이다. 기막힌 학력 인플레 시대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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