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마라토너 이용술씨 풀코스 49회 완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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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미국에 말라 러년(33·여)이 있다면 한국에는 이용술(41)씨가 있다. 시각 장애인인 李씨는 최근까지 마라톤 풀코스(42.195km)를 49회 완주하고 울트라 마라톤(1백km)의 하프코스 격인 63.5km를 3회 완주한 건각(健脚)이다.

4일 새벽(한국시간) 뉴욕마라톤에서 시각장애인 말라 러년이 주위의 따뜻한 배려에 힘입어 2시간27분10초의 기록으로 5위로 골인했다는 소식을 듣고 李씨는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러년이 뉴욕 시가지를 내달리고 있을 때 李씨는 한강변에서 열린 1백km 울트라 마라톤에 출전했다. 그러나 40km 지점인 성수대교 부근 둔치에서 돌을 잘못 밟아 나동그라져 발목을 접질리는 바람에 경기를 포기해야 했다.

"시각 장애인이 정규 마라톤 대회에서 부상 위험 없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미국의 사회적 환경이 너무 부럽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거의 기대할 수 없지요."

李씨는 스무살 때인 1981년 앞을 못보게 됐다. 친구들의 싸움에 말려들어 둔기로 머리를 맞아 시신경을 다쳤다.

"당시의 절망감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자살을 수없이 생각했지요."

그러나 그는 운동을 통해 다시 일어섰다.

"80년대 말 인천 숭의동 부근 헬스클럽에 나가 러닝머신 위에서 달렸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보려는 생각에서였지요. 죽어라고 뛰고 나니까 스트레스가 확 풀리더군요."

李씨는 마침내 갑갑한 실내에서의 운동 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서서히 밖으로 나오게 됐다.

처음엔 집 근처의 학교 운동장에서 한두시간씩 달리다가 93년 마라톤 대회에 도전하게 됐다. 동생이 옆에서 안내인 겸 길동무로 도와주었다.

안마시술소를 운영하며 생계를 꾸리는 그는 경기도 일산에 살고 있다. 일산 호수공원은 그동안 워낙 많이 달린 곳이어서 혼자서도 달릴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따금 시각 장애인 마라톤 동호인들과 함께 남산 순환도로를 달린다.

李씨는 지난해 4월 인천공항 개항기념 마라톤 대회에서 '달리는 한의사' 주승균(평강한의원 원장)씨를 만나 마라톤 인생에 전기를 맞았다.

풀코스를 16회 완주한 마라톤 매니어인 朱씨는 지난해 초부터 '희망의 마라톤'(www.hopemarathon.com)이란 온라인 마라톤 동호회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회원들이 1m 달릴 때마다 1원씩 모금해 중증 장애인 시설에 수술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3천7백만원을 모았다. 李씨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그동안은 저 자신의 분노를 삭이기 위해 달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라톤을 통해 저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돕고 있습니다. 삶의 보람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습니다."

신동재 기자

dj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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