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3국연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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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것은 1941년 6월 22일이었다.

독일과 소련이 전면전에 들어가자 영국과 미국은 즉각 이념상 적국인 소련에 대한 원조의사를 표명했고 8월 12일엔 '대서양헌장'을 발표했다. 영국·미국·소련의 반(反)파시즘 연합이 사상 처음으로 형성된 것이다.

당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주된 이유는 미국과 영국과의 장기전쟁에 대비한 후방의 안정과 자원확보 때문이었다. 특히 전쟁의 혈(血)이라고 할 수 있는 식량과 석유를 위해서는 소련의 바쿠 유전과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 확보가 필수였다. 지정학과 자원, 그리고 세력 이동의 포석을 함께 한 개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의 야욕은 독·소전쟁이 장기전이 되면서 결국 실패로 끝이 났고 파시즘을 종식시킨 3국연합도 냉전의 시작과 함께 종식됐다.

21세기가 되면서 신(新)3국 연합의 모습이 다시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9·11테러 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최근의 러시아 및 카스피해 유전지대에 대한 미국과 영국 석유 메이저들의 투자, 미·러간 이라크 석유에 대한 접근권 협상, 최근의 국제정세 속에서 보여지는 미·러·영의 협력의 모습은 뭔가 이들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묵계가 있고 이러한 청사진들이 속속 실행돼 가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전에서 사용할 물자를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와 무르만스크, 헬싱키에서 러시아 철도를 연계해 수송해준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들간의 협력의 밀도는 생각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러시아 철도를 활용한 미군 군수물자의 수송은 미군의 중앙아시아 주둔 허용과 함께 냉전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새로운 차원의 미·러간 협력이며 복잡한 계산에 따른 대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영국은 다른 유럽국들과 달리 괴(怪)가스를 사용한 러시아의 체첸 인질극 진압과정을 적극 옹호하고 있고 조만간 체첸 반군 단체들 중 일부를 테러리스트 단체로 규정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반(反)파시즘 전선 때와는 다르지만 요즘 세계는 다시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과 문명세계의 대결이라는 전선이 명백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선이 석유와 지정학,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을 매개로 한 상호이익 등이 복잡하게 연계된 쪽으로 이동되고 활용된다면 이는 문명 대 테러의 대결이 아니다.

김석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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